이미지 크게보기 삶을 지배하는 것은 ‘생각’이지만 그 아래에서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감각’이다. 이 같은 ‘일원적 이중 장치’가 고독·착각·후회·집착·공감 등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동시에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는 동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료사진

- 생각의 속임수 / 권택영 지음 / 글항아리

고독·착각·후회·집착·공감
문화·예술을 창조한 원동력
인공지능은 흉내 내지 못해

심리학으로 문학·영화 분석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면서
인간에 대한 통찰 풀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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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수사처럼, 생각의 지평은 무한대로 확장하지 않는다. 생각은 한 존재의 자기 증명이기에 학습과 경험 혹은 다양한 추체험 등을 통해 한정적으로만 확장된다.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 권택영의 ‘생각의 속임수’에 따르면 이를 보충하는 것이 ‘감각’이다. 삶을 지배하는 것은 ‘생각’이지만 그 아래에서 꿈틀대며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이 ‘감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일원적 이중 장치”라고 규정한다. 이 이중 장치가 고독·착각·후회·집착·공감 등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일, 즉 “문화와 예술”을 창조한 동력이다. “인공지능은 결코 흉내 내지 못하는 뇌의 고유한 인문학적 기능”은 이렇게 탄생한다.

‘생각의 속임수’에서 권택영이 하는 질문, 아니 모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질문은 “삶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이다. 저마다의 대답이 난무하는, 그럼에도 인류 역사에서 정답은 없었던 이 질문을 우리는 왜 “싫증 내지 않고 자발적으로”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문학과 영화 등 친근한 소재를 끌어다가, 거기에 프로이트와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인간의 고독·착각·후회·집착·공감은 물론 이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 내면을 탐구한다.

먼저 고독을 보자. 스스로 침잠해 절대 고독에 이르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저자가 보기에 모든 고독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허먼 멜빌의 대표작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스스로 유폐를 선택했지만, 그 고독의 경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월가의 변호사다. “고립과 단절의 경험이 이상한 행동”으로 나타난 바틀비와 월가 변호사는 이전까지 접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 생경한 고독의 경험을 “관계 속에서” 인식하게 됐다. 그 관계 속에서 자의식도 탄생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다윈의 진화 이론을 덧붙여 저자는 “나를 타인과 구별해 개체로 바라보는 비스듬한 시선”인 자의식이 인간의 특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제, 즉 진화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고독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규정한다.

뭐든 행동으로 보여주는 벌들의 언어는 정확한 반면, 모든 인간의 언어는 중의적이다. 발화자의 의도와 달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와 상황 등이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문학이 그렇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을 해석하는 이는 결국 독자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를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문학의 윤리이자 자유”라는 말로 표현한다. 문제는 종종 이 해석의 여지가 ‘후회’하는 인간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말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닌데도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저자는 헨리 제임스의 ‘정글 속의 짐승’(정글의 야수)을 통해 “기억의 저장고가 텅 비어” 있는 한 남자와 “그와 지낸 시간들을 자세히 기억”하는 한 여자의 ‘기억’을 대비시켜 “기억은 사랑”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해 사랑이 부재한 현실을 살며, 날마다 후회하는 인간인 셈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삶에 후회만 난무하는 건 아니다. 따스한 ‘공감’이 삶을 아름답게 할 때도 많다. 공감은 “자의식을 가진 인간의 특성”이다. 결국 “고독하고 착각하고 후회하고 집착하는 인간”은 곧 “공감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다양한 고전과 문학, 문화 콘텐츠를 넘나드는 저자는 ‘뇌과학’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는데, 거울뉴런과 공감에 대한 최신 연구 조류들을 통해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호 주관적이고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다시 말하면 공감하는 주체라고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공감의 정의를 좀 더 명확하게 한다. 하품이나 웃음을 따라 하는, 타인과 의견을 같이하는 동의의 개념 정도가 아니라 “뇌의 정상적인 구조와 관련되기에 진화한 인간이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고 타인과 어울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이 바로 공감이다.

‘생각의 속임수’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아마도 6장 ‘나는 왜 알면서 하지 않는가’일 듯싶다. 인간은 고독·착각·후회·집착·공감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알면서 인간은 무언가를 할 때도 있고,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젊은 베르테르를 보자. 그는 샤를로테가 친구의 정혼자임을 알면서도 끝내 사랑을 접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베르테르뿐인가. 건강을 위해 운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몸을 ‘1’도 움직이지 않는 게 우리다. “막무가내인 파충류적 감각”과 이성을 동시에 보유한 우리 모두는 실천을 두고 늘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의 속임수’를 처음 손에 들고 ‘인공지능이 따라 하지 못할 인문학적 뇌’라는 부제가 의아했지만, 읽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독·착각·후회·집착·공감은 물론 행동과 윤리 등의 문제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일원적 이중 장치, 즉 생각의 속임수가 가능한 인간만이 여전히 삶으로서의 문학과 과학, 미적 경험을 오롯이 향유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인간에 대한 통찰을 풀어낸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어설픈 글줄로는 표현할 수 없다. 쉬이 읽히지 않겠지만, 단언컨대 인간 존재를 알아가는 즐거움, 그것을 ‘읽는’ 즐거움만큼은 충만하다. 384쪽, 1만8000원.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