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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운 논설위원

언과기실(言過基實). 말이 실체를 앞선다는 뜻이다. 지난 25년간 북한 핵·미사일 협상 과정이 꼭 그렇다. 말만 많고, 결과는 없다. 1992년 2월 남북비핵화 공동선언, 1994년 미국-북한 간의 제네바 협정(Agreed Framework)이 나올 당시는 협상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인지, 당사국들이 말보다 합의에 집중했다. 그러나 북한이 합의를 깨고 핵·미사일 개발을 노골화하면서 한·미 양국에서는 행동보다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2006년 9월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식’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2009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은 미 외교협회(CFR)에서 ‘그랜드 바겐’이라는 거창한 대북 정책을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북아 평화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라는 정책 세트를 내놓았다. 돌아보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새삼스럽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북한이 한 번도 공식 요구한 적이 없는 ‘체제 보장’이란 말이 필수 용어가 됐다.

미 정부는 내심 한국 정부의 ‘말잔치’에 냉소적이었는데,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자 오히려 잔치판이 워싱턴으로 넘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편의적으로 써오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용어에 갑자기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는 CVIG(완전, 검증 가능, 불가역적 체제 보장)란 말이 한국 내에서 ‘제조’되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아무 생각 없이 인용하기도 했다.

미 정부는 CVID란 용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시점에 C를 P(permanent·영구적인)로 바꾼 PVID를 공언하더니, 최근에는 난데없이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들고나와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FFVD의 첫 글자 Final이 CVID의 I와 마찬가지로 불가역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북한이 CVID란 용어에 반대하기 때문에 내놓은 대체 용어라는 것.

30년 가까운 언론인 생활에서 터득한 노하우가 있다. 기사나 칼럼의 첫 서너 문장을 읽어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더 읽지 않는다. 필자가 잘 모르거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협상도 마찬가지. 말은 현란해지고 행동은 없는 걸 보면 이번에도 북한 비핵화는 쉽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