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필성(오른쪽) 단장, DJ 유한권(〃 두 번째) 씨 등 해피미디어단원들이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강남 시니어 플라자 4층 스튜디오에서 ‘보이는 라디오’ 생방송을 마친 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강남시니어플라자 ‘해피미디어단’

이필성 단장 주축 20여명 활동
집필·촬영·편집·송출 능수능란

유튜브 등 통해 전세계 생방송
‘보이는 라디오’ 베타 테스트중
올 하반기부터 정식으로 방송

“우리만 즐긴 재미 나누고 싶어”
3개월‘방송기자과정’ 출강도

2014년부터 단편영화도 찍어
단원들이 연출·촬영·연기까지
2016년 ‘지하철리사이틀’개봉

“3, 2, 1… 큐, 여기는 강남 시니어 플라자 라디오 방송입니다. ‘보이는 라디오’ 생방송으로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확행이라는 말 들어 보셨죠. 일상에서 느끼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이랍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오포’니, ‘칠포’니 하며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지친 마음에 자기 위안을 주려는 용도로 유행하게 된 단어 같아 좀 안쓰럽기도 하지만 우리 세대에게도 정말 필요한 것이‘소확행’ 아닌가 싶습니다. 당장 능선길을 걸으며 초록의 냄새를 맡아보고 보랏빛 제비꽃을 찾으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껴보고 싶은데요. 함께 가보실까요?”

스튜디오에서는 이동원, 박인수의 노래 ‘향수’가 흘러나왔다. 방송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편안하게 진행됐다. 프로의 향기가 나는 이날 방송은 원고 집필에서부터 촬영, 편집, 송출까지 모두 ‘강남 시니어 플라자 해피미디어단’의 작품이다.

20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강남 시니어 플라자 4층에 위치한 해피미디어단 스튜디오를 찾았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시간, 잠시 숨을 돌릴 법도 하지만 이필성(73) 단장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끊임없이 방송 음향, 송출은 물론 곧이어 진행될 1시간 분량의 방송 원고까지 일일이 체크하며 능숙하게 생방송 현장을 이끌고 나가는 이 씨의 모습은 여느 전문 라디오 프로듀서(PD)와 다를 바 없었다. “전 세계에 우리 방송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허투루 하면 되나요.” 이 씨가 스튜디오 앞에 놓여있는 화면을 가리켰다.

이날 방송이 유튜브와 아프리카TV, 페이스북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었다. 채팅창에는 방송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한 네티즌은 “미국에서 잘 보고 있습니다”라며 신청곡을 남겼다. “올 하반기부터 ‘보이는 라디오’ 생방송을 정식으로 시작할 계획입니다. 지금은 일종의 ‘사전 베타 테스트’ 기간인 셈이지요.” 따로 준비 기간을 거쳐야 할 정도로 해야 할 일이 많을까. 이 씨가 안경을 고쳐 쓰고 웃었다. “생방송,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씨는 국내 유일의 시니어 미디어 비영리법인인 ‘해피미디어단’을 이끌고 있다. 2012년 강남 시니어 플라자 회원 중 방송에 관심 있는 20여 명이 뭉치면서 해피미디어단이 결성됐다. 활동 초기 수강하고 있는 운동 및 교양 강좌를 시니어 플라자 자체 방송에 소개하던 이들이 전문 미디어단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한 방송국의 국민 기자단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자체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좀 더 욕심이 났죠. 마침 국정홍보처가 운영하는 케이티브이(KTV) 국민방송에서 기자단 1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저거다’ 싶었죠. 원칙적으로는 방송 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시니어 플라자 자체 방송 경력을 내세워 우격다짐 식으로 들어갔죠. 처음에는 단원 중에 아무도 정식 방송 경력자가 없어서 교육을 아주 호되게 받았어요. 18명이 지원했는데 나중에 5명은 못하겠다고 그만둬 결국 13명이 1기 기자 과정을 수료했죠.”

방송기자 활동을 거치고 나면서 방송에 대한 욕심이 커졌다. 이 씨를 비롯한 미디어단 단원들은 촬영, 편집, 조명 등에 대해서도 따로 공부를 시작했다. 때로는 외부에서 강사까지 초청해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단원들도 절반은 ‘방송 전문가’가 다 됐다. 얼마 전부터 해피미디어단 단원들은 서울특별시립 서울노인복지센터에 3개월짜리 ‘방송 기자 기초 과정’을 만들어 출강을 나가고 있다. 이 씨가 스튜디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송이 정말 재밌어요. 찍는 재미, 편집하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모릅니다. 우리만 즐겼던 이 재미를 이제는 다른 노년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요.”

이 씨는 사실 ‘보이는 라디오’ 생방송 말고도 해피미디어단의 주력 상품은 따로 있다고 귀띔했다. 바로 단편 영화다. “2014년부터 단편 영화 7편을 제작했습니다.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이 걸리니 쉬지 않고 영화를 제작해온 셈이지요. 물론 시니어 미디어단에서 자체적으로 기획, 시나리오, 연출, 촬영, 연기까지 전부 맡았습니다. 대부분이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이고, 상도 꽤나 받았어요.”

이 씨는 그중에서도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2016년 개봉한 ‘지하철 리사이틀’을 꼽았다. 제작에 해피미디어단 소속의 최은화 감독과 단원 30여 명이 참여했다. “지하철 리사이틀은 지하철 에티켓을 코믹하게 연출한 옴니버스식 영화입니다.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버릇없다’며 혀를 차고 젊은 사람들은 그런 어른들을 ‘꼰대’라 부르며 불편해하죠. 서로 네 탓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먼저 본보기를 보여 에티켓을 지켜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3부작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가 당부하는 것은 ‘나이가 많다고 새치기하지 않기’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지 않기’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하지 않기’다. “영화에서 말하는 3가지만 잘 지켜도 어른들이 ‘꼰대’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짧은 영화라도 노년에 영화 제작에 도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어려움이 없는지 물었다. “물론 어려운 게 많았죠. 영화는 지금까지 만들었던 뉴스 형식의 영상물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각이 필요하더라고요. 단원들끼리 모여 밤새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나면 서로의 감상을 나누며 토론했어요. 영화를 보면서도 어떻게 하면 재밌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것만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영화 제작에 있어 가장 어려웠던 점은 분장이었다. “영화를 촬영한다고 하는데 우리 같은 할아버지들이 뭘 압니까. 그러니까 여성 단원들이 전부 집에서 화장품들을 싸 갖고 나와 배우들을 분장시켜주었죠. 의상도 각자 집에서 가져온 것들을 개조해서 만들었어요. 하하하. 할아버지들이 평생 살면서 화장품이나 옷에 관심을 가져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이 씨는 짧은 다큐 영화를 찍을 때도 엄격하게 촬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영화를 찍을 때는 최소 4번 이상의 리허설을 실시한 뒤에 촬영에 들어갑니다. 주연도 아무나 시키지 않습니다. 작가가 요구하는 캐릭터와 가장 적합한 사람이 누구일지 내부에서 격렬한 토론 끝에 정합니다. 물론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최대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하죠. 돈 한 푼 안 받고 그저 방송이, 영화가 좋아서 온 단원들입니다. 분장도 자기 돈으로 하고, 차비도 자기 돈으로 사용하고, 밥도 자기 돈으로 사 먹지만 예술인의 자존심만큼은 양보할 수 없죠.”

이 씨에게 단장으로서의 포부가 무엇인지 물었다. “프랑스 대사관 상무관실에서 오랜 시간 근무한 뒤 10년 전에 정년을 맞았습니다. 처음에 은퇴하고 나니 공허하기만 했죠. 뭘 해야 하나 싶었고…. 그런데 미디어단 활동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찍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미디어단에서는 은퇴 이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풀어갈지가 더 중요하죠. 단장으로서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많은 노년이 라이브 방송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그래서 모두가 내 이야기, 가족 이야기, 손자 이야기를 라이브로 엮어 멋진 작품으로 담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희권 기자 leeheke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