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태우 前 통일연구원장

“기대감을 안고 상자를 열었지만, 안은 비어 있었다.” 미·북 싱가포르 회담의 공동 발표문을 보고 미국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일성(一聲)이다. 필자의 생각도 비슷하다. 알맹이가 없음은 물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발 동맹 위기까지 느꼈다. 북한 비핵화의 강도·속도·절차 등에 대한 언급은 없는 대신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고까지 했다.

비핵화의 강도와 관련해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CVID)는 미국 고위관리들의 거듭된 공약이었다. 하지만 막상 미·북 공동 발표문에는 실종됐다. 게다가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고 한 제3항은 이상했다. 북한이 오랫동안 선전해온 ‘조선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일방적 핵 폐기’가 아닌 ‘미·북 상호 핵 군축’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분석은 북한 정권이 이번에도 시간벌기 기만극을 하면서 핵 포기를 지연시킬 것이라는 악의(惡意)를 전제한 것이다. 반대로 북한이 핵 포기를 통해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 되겠다는 선의(善意)를 가지고 남북, 미·북 정상회담에 나선 것이라면 문제 될 게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4·27 남북 정상회담과 6·12 미·북 정상회담이 유럽의 냉전을 종식시킨 1989년 ‘몰타선언’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갖는다.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공동 발표문에 담지 않은 비공개 합의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보좌를 받는 트럼프 대통령이 태무심하게 부실한 발표문에 덜컥 서명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도 조금은 무리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후속 핵 협상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는 발언은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육체는 죽는다. 동맹도 연합훈련을 하지 않으면 유명무실해진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안보에 무신경한 듯 연합훈련을 않겠다고 말한 데 대해 많은 국민은 허탈감을 느꼈고, 한반도 유사시 도와줄 나라가 동맹국뿐이라는 현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겐 충격이었다.

북의 평화 공세 이후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문제점은, 북한의 선의만을 전제하고 일사천리로 달려오면서 악의에도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성찰한다면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안보 원칙 준수에도 같은 비중을 실어야 한다. 최우선 순위는 핵 협상에서 ‘알맹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북한 편을 들기보다는 국제사회와 한 편이 돼 북한을 설득·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동맹 위기론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동맹 경시’로 단정하기는 좀 이르다. 비핵화를 넘어 북의 체제 변화를 이끌어내는 다른 계산법이 있는지도 모른다. 동맹 경시 가능성에 대해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하다. 미국민은 한국이 6·25전쟁에서 적화통일을 막아주고 이후 안보 방패를 제공해 경제 번영을 가능하게 해준 동맹국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으로 느낄까? 미국의 핵심적 세계 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에 동참하지 않고 침묵하는 한국을 중요한 동맹국으로 여길까? 한국 내 반미 풍조를 보면서 한국을 지켜줘야 할 나라로 볼까? 지금은 이런 자문(自問)과 함께 동맹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할 때다. 그것이 북한 비핵화를 위한 ‘알맹이들’을 조속히 만들어내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