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우리 음악의 길을 한평생 같이 걸어온 ‘지음(知音·소리를 아는 참된 벗)’, 대명창 안숙선(왼쪽)과 명고수 김청만이 지난 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나 국악 인생을 회고하고 있다. 안 명창은 이날 심한 감기로 목소리조차 내기 쉽지 않았지만 김 명고가 장난스레 말을 걸자 금세 얼굴에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 안숙선 명창-김청만 고수, 내달 ‘여우락 페스티벌’ 한무대

어린나이에 上京 소리 배워
함께 국악계 거장으로 우뚝

1994년 6명 ‘지음회’ 결성
공연음반 지금도‘최고’꼽혀

구음시나위·육자배기 준비
찰나의 호흡·눈빛 교류 척척

“1994년 ‘지음(知音)’끼리 공연을 하기로 하고 리허설을 겸해 만났는데,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흰 구름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서로 ‘좋소 좋소’ 하더니 공연할 때는 전부 얼싸안듯이 사랑스럽고 귀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나요. 다들 서로의 기술에 혼이 팔렸죠. 그때 참 행복했던 것 같아요.” 한국 소리의 맥을 잇는 안숙선(69) 대명창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24년 전 서울 종로구 연강홀에서의 공연 기억을 되살리자, 그 시절 함께 무대에 섰던 김청만(72) 명고수가 조용히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난 이들은 지나온 세월이 무색하게 때로 소녀 같고 때로 청년 같은 얼굴로 세월의 깊숙한 곳에 담겨있던 옛 추억을 조심스럽게 꺼내보였다.

전설이 된 당시 공연의 이름은 ‘안숙선의 지음’으로, 안숙선과 국악계 벗인 김무길(거문고), 김청만(타악), 서용석(대금), 윤윤석(아쟁), 안옥선(가야금)이 모여 무대에서 펼쳐낸 우리 음악의 정수였다. 당시 공연실황을 토대로 만들어진 음반은 지금까지 국악 전공자 및 애호가 사이에서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힐 정도다. 어느덧 70세 안팎의 나이에 이른 대가들이 다시 한 번 어렵게 발걸음을 뗀 것은 7월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2018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24년 만의 ‘지음’ 무대(7월 13∼14일)를 선보이기 위해서다.

지음회 중에서도 두 사람의 인연은 각별하고, 돈독하다. 어린 나이 서울로 상경해 식구처럼 같이 울고 웃으며 온몸으로 음악을 배워왔던 사이로, 어느덧 알고 지낸 지 50여 년이 흘렀다. 안 명창은 19세의 나이에 상경하자마자 만난 김 명고를 “예술 한다고 겉멋 들지 않고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실하게 음악을 해왔던 분”이자 “생활고 때문에 부업으로 작은 가게를 하면서도 후배들에게는 밥값을 절대 못 내게 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김 명고는 “당시만 해도 국악인들이 마음껏 연주할 공간이 국립창극단 연습실밖에 없었는데, 늘 그곳에 가장 먼저 와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은 안 선생이 유일했다”고 말했다. 안 명창이 1979년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간 후, 김 명고도 1981년 창극단에서 북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물고 물리며, 국악계의 큰 흐름을 형성해갔다. 이들이 1994년 지음회를 만든 것도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당대 국악계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안 명창은 “그때 제가 40대였으니 되돌아보면 힘은 좋았으나 속 깊이 들어가 소리로서 음과 양, 인생의 희로애락을 넓게 표현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제는 지나간 세월을 느낄 만한 깊은 소리를 낼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이들은 첫 공연 후 정기적으로 무대를 갖자고 했지만, 두 지음이 작고하면서 무산됐다고 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구음시나위’ ‘춘향가 중 이별가’ ‘육자배기’ ‘가야금 병창’을 비롯해 구슬픈 남도음악을 들려준다. 옆에 있던 김 명고가 “이번 공연 땐 선생님들 앞에서 움츠러들지 말고 쭉 밀어붙이면 된다”고 웃으며 말하자 안 명창은 “아직도 그게 맘처럼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번 공연에서는 고인이 된 서용석, 윤윤석을 대신해 김일구(78) 명인과 원장현(67) 명인이 무대에 힘을 보탠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인 안 명창의 소리가 공연을 끌고 간다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인 김 명고의 북 소리는 창자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다른 악기들의 호흡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소리할 때 화살이 파르르 떨다가 과녁에 딱 들어 맞는 것 같은 그 찰나의 순간에 고수와 호흡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안 되면 창자로서 힘이 쭉 빠져버려요. 청만 선생과는 그게 되는 사이죠.”(안숙선) “저는 아직도 가슴 속에 ‘일고수 이명창(판소리 공연 때 제일은 고수요 다음이 명창이라는 의미)’이란 말을 품고 살아요. 고수라는 게 악·가·무 전체를 알고 창자의 마음에 들어가야 하는 건데, 요즘 젊은 세대는 한 악기만 파고들려고 하니 아쉬워요.”(김청만)

이들이 눈빛만으로도 음악적 교감을 이루는 것은 아직도 젊은 국악인 못지않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 명창은 올해만 해도 국립창극단의 ‘심청가’ 등 굵직한 공연을 선보였고, 오는 22∼27일 국립국악원에서 하는 창극 ‘화용도 타령-타고 남은 적벽’에서는 판소리 인생 최초로 ‘조조’ 역을 맡는다. “요즘은 퓨전 음악 등 새로운 시도가 많지만 많은 음악 팬이 결국 판소리 본류로 다 돌아오더라고요. 조용한 데서 날카로운 걸 만들어 내고 소리 한 소절로 수만의 군사를 불러오는 건 우리 소리밖에 없어요. 저는 가만히 앉아서 걱정만 할 게 아니라 칼을 빼들고 해보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안숙선) 그런가 하면 김 명고는 연간 50차례 이상의 공연을 소화하는 것은 물론, 서울예대에서 후학도 양성하고 있다.

두 사람은 끝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는 지음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국악계에서 젊은 시절부터 만나서 지금까지 활동하시는 분들이 열 손가락도 안 돼요. 시간이 갈수록 이런 분들이 더욱 소중해지죠. 지금 제일 자주 만나는 분이 안 선생인데, 가끔 공연 끝나고 식사도 하지 못하고 가게 되면 내내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김청만)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