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재독화가인 노은님 작가가 경기 양주시의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 전시된 그림 ‘달에 노란 토끼’(한지에 아크릴, 300×280㎝)를 배경으로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재독화가 노은님‘SIMPLE’展
장욱진미술관서 8월 26일까지

派獨뒤 향수 달래려 그림 시작
獨 표현주의·동양철학 결합해
동화 분위기로 자연 담아 명성
유럽선 백남준과 어깨 나란히

독일의 한국인 원로 화가인 노은님(72) 작가가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1970년이다. 그의 독일행은 독일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노 작가는 조국 근대화 시대에 ‘파독 간호사’란 타이틀 아래 독일에 수출되었던 경제 디아스포라 세대다.

그러나 그의 지금 직업은 화가다. 이번에 남편인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 게하르트 바츠 교수와 함께 한국을 찾은 것도 경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4월 27일 개막해 8월 26일까지 계속되는 ‘SIMPLE 2018: 장욱진·노은님’전을 위해서였다.

국내에서는 그의 이름이 조금 낯설지만 유럽에서는 세계적인 전위 예술가 백남준이나 요제프 보이스와 같은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현지에서 그의 작품은 독일 표현주의와 동양철학의 존재론을 결합한 독자적 결과물로, 자연을 노래하는 ‘그림의 시(詩)’로 명성을 얻고 있다. 2019년 11월에는 독일 남부 미헬슈타트시립미술관에서 노은님 영구전시실도 개관할 예정이다.

후학 양성에도 힘써 1990년부터 2010년까지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2016년에는 서울여자대학이 그를 석좌교수로 임용했다.

48년 전 독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노 작가는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의 병원에서 뱃사람들이나 인근 유흥업소 종사자, 심지어는 알코올 중독자를 상대하며 병원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간호사 생활은 채 3년을 못 넘겼다. 낯선 이국땅에서 고독과 향수를 달래고자 그린 그림이 동료 간호사들에게 목격돼 병원회의실에서 전시회가 열렸고, 그 전시회 이후로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독일로 간 것도, 화가가 된 것도 모두 엉겁결에 그렇게 됐어요. 포천군 면사무소에서 결핵관리요원으로 일하다가 해외개발인력공사의 파독간호사 광고를 보고 ‘한번 해볼까’하고 지원했더니 3개월 만에 여권과 항공티켓이 나왔어요. 또 독일에서 길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해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들로 전시까지 하게 됐습니다.”

국립함부르크미술대의 한스 티만 교수는 미대 입학을 적극 권했다. 티만 교수는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직계 제자였다.

“면접 볼 때 교수들이 왜 지원했냐고 물어봤어요. ‘사람들이 가라고 해서 왔다’고 하니 어이없어하더군요.”

입학 후 그는 나뭇잎을 갖다 베끼고, 새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앞에 놓고 그렸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여러 생각이 생겨났어요. 필연과 우연은? 물과 불, 흙, 공기의 4대 원소는 무엇인가. 힘은 어디로 흐르는가. 그런데 어느 날 항구 쓰레기통 속에서 인부의 해진 장갑을 보았어요. 그 이후로 사람들이 버린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평소 생각과 어우러져 작품도 추상화로 흐르기 시작했죠.”

졸업 후 유명 화랑들에서의 개인전에 이어 각종 예술상도 잇달아 수상하며 화가로서의 명성과 입지도 굳어졌다. 그는 유화나 한지에 그린 묵화뿐만 아니라 설치미술, 퍼포먼스, 유리채색, 세라믹 조각, 공공미술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1980년 현지의 ‘평화를 위한 비엔날레’에는 백남준과 함께 초대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술전문지인 아트인컬처의 김복기 대표는 그의 작품에 대해 “시적인 판타지, 꾸밈없는 유머, 초현실주의적인 환상, 문자적·기호적 요소의 도입, 화면을 경쾌하게 산보하는 필치, 미묘한 색채 등을 한껏 펼쳐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고 장욱진 화백과 노 작가는 어떤 인연으로 이번에 함께 작품을 선보이게 됐을까. 노 작가는 “아프리카를 4차례 방문, 그곳에서 단순함의 원형과 만났다”며 “그 단순함이 작품에도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장욱진미술관의 변종필 관장은 “장욱진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노 작가 역시 순수한 마음으로 물고기와 새, 꽃 등을 과감한 생략과 동화적 분위기를 회화작품에 담아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