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인간의 이성은 고도의 사회적 협력을 위해 진화했다. 자신이 더 잘 생각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이다. 사진은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 자료 사진

- 이성의 진화 / 위고 메르시에, 당 스페르베르 지음, 최호영 옮김 / 생각연구소

이성은 타인과 상호작용때 사용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려는 것

대부분의 인간 행동은 ‘본능적’
인지하는 과정서 숱한 오류 발생

이성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자기 합리화하고 편향 부추겨

일관성·일반성 갖춘 토론이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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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한때 인간 자부심의 오롯한 근거였다. “인간에게만 이성이 있다.” 이성에는 인간이 더 빨리, 더 많이, 더 멀리 알도록 만들고 인간을 더 지혜롭게 하는 힘이 있다. “이성은 진화를 통해 인간에게만 부여된 인지적 초능력”이다. 이 힘 덕분에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종을 압도해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믿었다).

오늘날 이성은 인간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성은 오작동을 한 특성으로 한다. 철학자들(심리학자들)은 이성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인간이 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편향을 합리화하고 부추기는 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계몽의 결과는 인종차별이고 홀로코스트이며 젠더폭력이다. 인간은 속임을 당하거나 위협에 굴복해서 이러한 비극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합리적 추론의 결과로 이 일에 기꺼이 동참한다. “악은 평범하다.”

이성이 진화의 정점에 있는, 엄청난 자질도 아닌 듯하다. 대다수 동물에 달려 있는 눈(시각)은 얼마나 고차원인가. 빛을 감지하는 감광세포에서 시각에 이르는 진화적 여행은 얼마나 창발적인가. 복잡하지만 치열하고 요연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진화의 결과도 대단한 듯하다. 기계시각은 인간시각을 아직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하지만 알파고 사건이 보여주듯, 기계지능은 인간지능을 어느 면에서 이미 압도한다. 눈이 이성보다 복잡하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이 이성을 진화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쩌면 지구라는 환경에서 이성이 쓸모없는 요소인 까닭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이성의 진화’에서 프랑스의 과학자 위고 메르시에와 당 스페르베르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의 요술램프’에서 인간을 숱한 오류에 빠뜨리는 ‘잘못된 기계’로 전락해 버린 이성의 비밀을 파헤친다. 인간의 마음은 감각, 직관, 추리, 추론 등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다양한 자율적 모듈이 서로 협력해서 온갖 종류의 ‘인지’에 이르는 과정이다.

인지과학과 진화심리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활용해 저자들은 인지 과정에서 이성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흔히 믿는다. 이성의 힘을 통해 인간은 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여러 감각 신호와 이에 대한 무의식적, 즉각적 판단(직관)의 잘못을 바로잡아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이로써 변화하는 환경에서 다른 어떤 생물보다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이러한 우리의 믿음은 착각에 가깝다.

인지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동물이 적응하는 과정에서 진화했다. 움직이지 않는 식물은 인지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이동과정에서 끝없이 새롭게 수용되는 감각정보들을 수용하고 고도의 추론과정을 거친 후에야 반응한다면 생존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반응속도가 늦어지기 때문이다. 이럴 바에야 일정한 오류를 감수하더라도 이를 순간순간 처리하는 쪽(직관)이 생존에 유리하다.

실제로 인간이 행하는 행동은 대부분 진화 과정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직관(본능)이나 문화적, 사회적, 직업적으로 학습된 직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이해하는 데 인간은 숙고하는 이성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추리를 주로 이용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행하는 느린 추리(추론)는 언제 주로 사용하는가. 이성은 왜 존재하는가.

개개인이 세계 자체를 더 잘 파악하는 데 이성은 사용되지 않는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성은 고도의 사회적 협력의 필요에 따라 진화한 “이유에 관한 직관적 추리 메커니즘”이다. 이성은 “우리 자신이 더 잘 생각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다른 사람과 같이 행동할 이유를 설득하고 이를 수용하는 데, 즉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할 때 주로 사용”된다. 타인에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을 설득해 우리를 돕도록 만드는 도구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똑같은 양말을 좌판에 늘어놓고, 사람들한테 하나를 선택하게 한 후,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색깔이 예쁘다든지, 옷감이 좋다든지 하는 온갖 말들을 늘어놓는다. 편향은 이성의 본래적 특성이다. 사람들은 일단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유를 나중에 찾는다.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이를 수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편향에 사로잡힌 인간이 진화의 정점에 오른 것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종의 효과적인 거름망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즉 타자를 설득해 무리행동을 할 만한 공동의 이유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문제 해결에 필요한 더 나은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행동의 이유를 산출할 때만이 아니라 타자가 제시한 이유를 평가할 때에도 이성을 사용하는데, 남들한테는 더 엄격하고 더 객관적인 성향이 있다. 인간 이성의 이러한 특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활발할수록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을 줄여주는 효과를 불러온다. 저자들은 일관성과 일반성을 갖춘 논증(이유)을 자유로운 환경에서 주고받는 민주주의적 토론이야말로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560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순천향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