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내한 공연을 하는 해외 오케스트라의 사전 리허설은 많아야 2∼3회에 불과하다. 팍팍한 일정상 대다수의 악단이 한국 공연을 ‘메인’이라기보단 중국이나 일본 등을 함께하는 아시아투어의 ‘일부’로 치부하는 경향이 아직도 짙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최고의 바이올린 비르투오조(명인)로 떠오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와 내한한 유럽체임버오케스트라는 공연일보다 무려 7일 전부터 내한해 실제 무대에서 리허설을 거쳤다. 이전부터 놀라운 합주력으로 명성을 떨쳐왔던 이 악단의 앙상블을 ‘수박 겉핥기’가 아니라 그 ‘정수’를 체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공연 시작 전부터 시작됐다.

오랜 앙상블의 명성과 다수의 리허설의 결실은 지난달 27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가진 내한 공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첫 곡인 바흐의 ‘협주곡 BWV 1052’는 1738년 필사본 악보에 하프시코드 협주곡으로 돼 있었지만, 최근 이 곡이 원래는 바이올린 협주곡일 수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돼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주목을 받고 있고, 줄리아노 카르미뇰라나 프랑크 페터 치머만 등이 바이올린협주곡 레코딩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카바코스는 바이올린으로 건반의 변화무쌍함을 재현하던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과 달리, 이를 무반주 바이올린협주곡과 파르티타나 바이올린소나타 같은 실내악의 연장선으로 해석하는 듯했다. 청중별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나름대로의 설득력은 분명히 갖췄다. 카바코스는 앙코르곡으로 바흐 바이올린소나타 2번 안단테를 연주한 것은 이 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 카바코스가 활을 내려놓고 지휘봉을 잡은 슈베르트 교향곡 5번에서는(실제 연주에서 카바코스는 슈베르트 교향곡에선 맨손으로, 2부에서는 지휘봉을 들고 연주했다) 카바코스와 유럽체임버오케스트라의 합주력이 빛났다.

이날 마지막 곡이었던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은 유럽체임버오케스트라 특유의 흐트러짐 없는 합주력과 놀라운 관악기의 아티큘레이션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카바코스와 유럽체임버오케스트라는 강렬한 총주로 시작하는 1악장 서주에서부터 놀라운 합주력으로 청중들을 긴장시키더니, 빠른 템포로 이어지는 알레그로 콘 브리오를 흐트러짐 없는 앙상블로 이끌어갔다. 곡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금관과 목관이 이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됐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여기에 팀파니주자 존 차임스의 탁월한 리듬감이 곡 자체의 생동감을 배가시켰다. 2악장에선 명바이올리니스트인 카바코스의 영향력 때문일까, 에스프리가 진한 현의 울림이 돋보였다.

리듬감이 충만한 3악장과 4악장은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강약의 대비를 확실하게 가져가는 선 굵은 연주는 빠르고 리듬감 있는 악장에서 그 기량을 최고조로 발휘했다. 탁월한 리듬감과 놀라운 합주력에 팀파니와 금관의 강렬한 폭발력까지 갖추면서, 유럽체임버오케스트라는 지난 1990년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지휘로 발매된 동곡 레코딩을 상회하는 연주를 들려줬다. 바이올린 연주할 때보다는 어쩐지 어색한 자세로 흐느적거리던 카바코스의 지휘 모습은 마치 이 곡의 최고 해석가로 꼽혀왔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빙의된 듯했다.

인지현 기자 loveof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