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한국계 1.5세인 이민진 작가는 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지만 한국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화제작 ‘파친코’는 지난해 말 출간 이후 미국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문학사상 제공

- 재일교포 잔혹사 ‘파친코’ 쓴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

원산 출신 父·부산이 고향인 母
7세 때 美 이민 한국계 1.5세대
일본계 남편 만나 재일교포 자각

日서 사는 한국여성 80년史담아
이방인이지만 운명 탓하지 않고
각각의 욕망과 불행 탁월히 묘사

NYT ‘2017올해의 책10’선정
“책에 ‘우리는 가족’이라 사인
이 생각이 요즘 내게 가장 중요”

“나는 출판 기념회에서 책에 사인할 때마다 ‘우리는 가족’이라고 적는다. 왜냐하면 이 생각이 요즘 내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화제작 ‘파친코(Pachinko)’의 저자이자 재미교포 이민진(50) 작가의 올해 일정표는 6월까지 거의 꽉 찼다. 책이 2017 전미도서상 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후 뉴욕타임스와 USA투데이가 ‘올해의 책 10’으로 선정하고, 영국 BBC가 ‘2017 올해의 책’으로 뽑으면서 사인회 및 강연 요청이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에 진행했거나 예정된 행사만 약 20건. 이 작가는 캘리포니아, 뉴욕, 매사추세츠, 마이애미 등 미 전역을 순회하며 독자와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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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출판계를 뒤흔든 ‘파친코’가 마침내 국내 번역 출간됐다. 최근 문학사상이 2권짜리 단행본으로 펴냈다.

‘파친코’는 이 작가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다. 일본에서 ‘자이니치(在日)’라고 불리는 재일교포들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국가적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다루고 있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재일교포 이야기에 관심을 두게 됐을까. 이 작가가 자이니치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대학생 때인 1989년. 많은 자이니치가 일본의 사회적 편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후 작품을 구상했다.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따라 2007년 도쿄로 이주해 4년간 거주하면서 자이니치를 직접 취재했다. 자이니치에 대한 자각부터 소설로 완성하기까지 약 30년이 걸린 셈이다.

‘파친코’는 3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80년간의 서사를 펼쳐낸다. 가난한 집의 막내딸 양진은 절름발이 훈이와의 결혼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채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딸 순자를 키운다. 전통적이고 헌신적인 한국의 여성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순자는 삶이 좀 나아질까 했지만 다를 게 없다. 유부남의 꾐에 빠져 임신했다가 목사 이삭을 만나 결혼하고 일본 오사카로 이주해 이방인으로서 어려운 삶을 이어간다. 순자의 형님인 경희도 나을 게 없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인한 불행 앞에서 고뇌하지만 그런 운명을 탓하지 않을 뿐이다. 인생의 가혹함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자이니치인 이들은 아무리 애써도 헤어나올 수 없는 인생의 굴레를 처음부터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뉴욕타임스는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인생 속에 녹아 있는 개인적 욕망과 희망, 그리고 불행을 탁월한 기법으로 그려냈다”고 평했다.

이 작가는 예일대 역사학과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B형 간염으로 건강이 나빠지면서 변호사를 그만두고 작가로 돌아선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2004년 단편 ‘행복의 축’ ‘조국’ 등을 발표해 작가로 나섰고, 2008년 첫 장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으로 전미 편집자들이 뽑은 올해의 책, 미국 픽션 부문 ‘비치상’, 신인작가를 위한 ‘내러티브상’ 등을 받으며 얼굴을 알렸다.

이 작가가 2월 24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더 뉴요커’에 기고한 칼럼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그가 가진 정체성을 가늠하게 한다. 그는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가장 깊은 균열의 치유’라는 칼럼에서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때 남북한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고향이 함경남도 원산인 아버지, 부산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2개 코리아의 아이”라며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 때문에 통일을 원치 않는 한국 젊은이들이 많다는 설문조사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제 동계올림픽도 끝날 텐데… 한국인들이 가장 깊은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경쟁이나 군사력 일변도의 정책이 기운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시키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