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은 지난 20여 년간 벌처펀드가 국가나 국가 간 통제를 받지 않고 세계를 뒤 흔들면서 더욱 무력해지고 있다. 사진은 유엔 총회 모습. 자료사진

유엔을 말하다 / 장 지글러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세계화 된 금융자본 영향력 커
브라질·멕시코 등 파산 만들어

안보리 상임이사국 거부권 등
유엔의 한계 적나라하게 담아

개혁위한‘시민사회 연대’주장
김일성·반기문 등 평가도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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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의 팔레 데 나시옹(스위스에 있는 유엔 사무소), 그리고 일반적으로 유엔은 스파이들로 가득하다. 세계의 모든 첩보 기관, 특히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정도가 심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 같은 열강의 첩보 기관이 외견상으로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되는 대화를 엿듣고, 몰래 서류를 복사하고, 유엔의 국제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신임을 얻은 유엔 파견 외교단인 양 자주 행동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저자 장 지글러(84)는 스위스 출신 사회학자면서 저명한 기아문제연구자이고, 2000∼2008년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이후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일했고 현재도 그곳의 부의장을 맡고 있다. 오랜 시간 유엔을 내부에서 겪은 그의 이 같은 말은 유엔의 실체와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2016년 불어로 나온 이 책의 원제목은 ‘희망의 길’(Chemins d’esperance)로, 지글러가 유엔의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 평화를 일궈내기 위해 유엔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극복 방안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제 시민 사회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촉구한다. 이 책은 저자가 적극적인 대외활동에서 물러난 뒤 유엔에서 활동했던 시기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한 것이다. 그가 만난 장 폴 사르트르, 빌리 브란트, 헨리 키신저, 아라파트 등은 물론 김일성과 반기문 등 유명 인사에 대한 간략한 평가들도 관심을 끈다.

그가 세계 평화와 안녕을 해치며 유엔을 무력화시키는 첫 번째로 강대국이 아니라 벌처펀드(부실 기업·채권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자금)를 꼽는 것은 근래의 신자유주의가 국가는 물론, 지구적으로 미치는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오늘날 번영을 누리는 벌처펀드는 부자는 힘이 세고 국가는 힘이 약하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준다. 세계화된 금융자본은 각국에 지지자와 하수인을 두고 있다”며 ‘국가를 물어뜯는 벌처펀드’라는 제목으로 책의 1장에서 다룬다. 2015년 26개의 벌처펀드가 32개 채무국가를 상대로 227건의 소송을 제기했고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을 파산시켰다. 이러한 질서를 바로잡고자 유엔이 만든 ‘2030 어젠다’도 벌처펀드의 이익 앞에 고개를 숙인 강대국들의 정책 탓에 실효를 못 보고 있다. 아프리카 말라위는 벌처펀드가 제기한 소송으로 비축해둔 4만t의 옥수수를 팔아야 했고, 이로 인해 2002년 닥친 끔찍한 가뭄 당시 1만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고 국민의 절반이 넘는 700만 명이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었다.

책에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몇 차례 언급되는데, 강대국이 좌우하는 유엔 내부의 정치논리를 보여주는 대목에서다. 2006년 아프리카 출신 코피 아난 사무총장 임기가 끝났을 때 아시아 출신의 사무총장 순서가 됐으며, 인도는 파키스탄의 반대로 후보가 좌절됐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후보를 낼 수 없는 중국은 일본 후보를 막기 위해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던 반기문을 밀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 또한 자신들에게 충성심을 가질 거라고 기대해 반기문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저자는 1976년부터 2년간 식량위기를 겪은 북한을 세계식량프로그램에 따라 왕래한 적이 있는데, 당시 김일성을 잠깐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왕조 국가인 북한의 모습에 크게 실망했던 일들을 적고 있다.

저자는 유엔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유엔 상임이사회의 거부권 행사를 막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아난 사무총장 당시 이 같은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이사회 국가들은 외면했다. 그는 “이슬람국가(IS)의 출현으로 테러와 전쟁이 자국 내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트자, 이들 국가는 이 개혁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면서 “개혁안을 성사시키고 창백해진 유엔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국제 시민사회의 연대와 압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372쪽, 1만68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