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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교 국제부장

전종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은 “마치 6·15 시대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언급했다. 지난 17일 판문점 평화의 집, 남북 차관급 실무회담 자리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우리 민족끼리의 자주적 문제 해결, 연방제·연합제 통일 추진 그리고 경제협력 활성화가 요체였다.

그날은 25년 북핵 개발사에서 거대한 ‘사기’가 이뤄진 포석이기도 하다. 1994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거쳐 경수로 건설 지원을 챙겼고, 1999년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가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자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묘수를 고안해 냈다. 김 위원장은 6억 달러, 아니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비자금을 움켜쥐는 짜릿한 기쁨도 맛보았다. 그 돈은 고난의 행군에서 쓰러질 듯한 체제를 버티게 한 생명줄이 됐고, 오늘날 핵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탄생시킨 씨앗으로 자리 잡았다.

선대의 화려한 무용담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다시 쓰려고 한다는 의구심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처참하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고 과거 전철을 밟으려 한다면 정상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없다. 의심과 의혹은 의사 결정에 이르는 합리적 과정이다. 화해의 분위기가 넘실거리고 평화의 노래가 울려 퍼져도, 두 번 세 번 돌아봐야 한다. 네 번 다섯 번이라도 두드려 봐야 한다. 평창동계올림픽의 남북합작팀은 예고편일 뿐이다. 북한의 미녀 예술단이 서울과 강릉에서 아리랑을 연주하고, 남북이 손잡고 감격에 겨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군사회담 개최와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소식이 들릴 것이다. 18년 전에도 그랬다. 남북은 6·15선언 3개월 뒤 9월 26일 제주도에서 국방장관 회담을 열고 긴장 완화, 전쟁위험 제거, 평화구축에 합의했다. 2000년 시드니하계올림픽에서도 남북은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했다. 하지만 무엇이 달라졌는가. 김정은 위원장의 손에 ICBM이 들려져 있을 뿐이다.

모란봉악단장 현송월이 15일 예술단 파견 회의에서 들고나온 핸드백은 허세로 보인다. 세계가 보는 중요 협상에서 화려한 색상의 핸드백을 보란 듯 챙긴 여성 대표를 본 적이 없다. 너희가 아무리 압박해도 끄떡없다는 과시다. 한계상황에 내몰린 고난의 역설적 코드로도 읽힌다. 남북대화 기제는 북한이 시간이 필요하거나, 국면 돌파 필요가 있을 때 작동했다. 우리 사회 내부의 낭만적 평화론자들은 노르웨이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이론을 내세워 신뢰 회복, 군비 축소, 평화 구축을 외친다. 그들에게 대북 경제 지원과 군사훈련 축소는 믿음을 쌓아가는 과정이고, 힘에 의한 평화는 적폐 패권주의가 남긴 고루한 유산에 불과하다. 그러나 위장된 불임의 평화 뒤에는 적대적 충돌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핵은 고난의 마지막 행군, 대반전을 위한 절대무기다. 늦기 전에 거꾸로 된 항아리에 물을 붓거나 화성에서 꽃을 피우려 드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야 한다. 북한은 남북회담이라는 협주의 지휘자는 선군정치 최고존엄, 김정은 위원장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j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