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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巧若拙, 大辯若訥(대교약졸, 대변약눌)

큰 기교는 서툰 듯하고, 큰 달변은 더듬는 듯하다.

노자가 남긴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서툴고 눌변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화려한 기교와 유창한 달변으로 나아간다. 최고의 기교와 달변은 오히려 서툰 듯하고 어눌한 듯하다는 노자의 주장은 참으로 역설적으로 들린다. 여기서 유심히 살펴야 할 말은 ‘약(若)’자인데, 겉으로는 마치 서툰 듯하지만 그 속에는 정말 깊은 기교가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졸에서 교를 거쳐 다시 졸로 돌아왔으니 겉으로는 순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차원 발전한 것이다. 순환하면서도 발전하는 것, 바로 나선형이다.

대교약졸이야말로 동아시아 문화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구절이라 생각한다. 예컨대 동양화에서 서양화와 가장 큰 차이를 보여주는 장르는 수묵화이다. 흑과 백의 단순한 채색, 소박한 표현, 여백에서 풍기는 담백한 느낌을 중시하는 수묵화는 중국 회화의 성숙기인 송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중국문화사에서 송대는 대교약졸의 미학이 꽃피기 시작한 시기이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도 대교약졸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대교약졸은 동아시아인들의 삶 곳곳에 침투해 있다. 조계종을 세운 고려 지눌(知訥)선사의 ‘知訥’은 대변약눌을 안다는 말이다. 일본의 선불교를 서양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한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의 ‘大拙’도 대교약졸의 준말이다. 전 대통령 노태우(盧泰愚)의 ‘泰愚’도 ‘태현약우(泰賢若愚)’의 준말로서 대교약졸을 응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크게 현명한 것은 마치 어리석은 듯하다”는 뜻이지만, 그가 정말 자신의 이름대로 살았는지는 논외로 하자. 이러한 이름들만 보아도 대교약졸의 지문이 동아시아의 문화 속에 얼마나 많이 새겨져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상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