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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화가, 서울대 교수

유치환·윤이상 배출한 통영
강같이 푸근하고 눈부신 바다

특유의 색채·언어·소리가 되어
끊임없이 예술혼 움직이게 자극

예술을 사랑하는 시민들 표정서
국제적 음악도시 우뚝 설 것 예감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랏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청마 유치환의 시 ‘우편국에서’에서다.

청마는 음악의 윤이상과 더불어 대표적인 통영 출신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시인이 생전에 마음으로 연모했다는 한 여인에게 썼던 편지는 무려 오천 통을 헤아린다고 전해지는데,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여라’ 하고 시작하는 저 유명한 ‘행복’도 물론 그중의 하나이다. 나는 거의 20여 년을 그 통영에 드나들었다.

사연이 있었다. 당시 한 지자체장의 부탁으로 장차 음악 도시 통영을 디자인하는 일에 함께하자는 권유를 받았던 것이다. 윤이상이나 유치환을 기리고 싶어 하던 그의 자문에 응하여 멀리 베를린까지 갔던 기억도 새롭다. 베를린의 윤이상음악연구소 일을 맡아보고 있던 볼프강 박사를 만나 독일에서의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생전의 윤이상이 돌아갈 수 없는 고향 통영을 너무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굳이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집을 들지 않더라도 바다, 그리고 그 바다로부터 바람에 묻어오는 갯내음에 버무려져 나온 것이 그의 음악적 바탕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나고 자란 통영과 아주 비슷한 느낌의 베를린 외곽 호수가 있는 곳에 살림집을 정해 놓고 있었다.

눈발이 분분하게 날리던 겨울의 초입에 그 통영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마침, 통영 국제음악제의 이용민 본부장으로부터 레온 베르벤의 하프시코드 렉처 리사이틀 공연이 있으니 내려오면 좋겠다는 전화도 있어서였다. 사실 ‘하프시코드’라는 악기는 좀 생소했지만, 프로그램 중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환상곡이나, 클라비나 연습곡 같은 명곡들이 눈길을 끌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가를 통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음악의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려주는 강좌형 음악 콘서트라는 점에 구미가 당겼다.

오랜만에 내려와 본 통영은 옛날에 내가 드나들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져 있어서 놀라웠다. 바다도 옛 바다 그대로이고 그 바다 위에 정겹게 떠 있는 산들도 그대로였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대체로 한 지역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할 때는 새로운 건축물들이 난립해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낯설고 서먹하게 바뀌어 버린 경우가 많지만, 통영은 그것이 아니었다. 달라지긴 달라졌으되 그 고유한 빛과 색을 잃지 않으면서, 뭐랄까 훨씬 무르익고 성숙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도시 전체가 하나의 지향점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됐는데, 그 지향점이 바로 ‘음악’이었다.

그 옛날 한 시장이 장차 통영을 국제적 음악 도시로 이름나게 하고 싶다며 꾸었던 꿈은 성큼, 현실이 돼 있었다. 파도가 벽을 때리는 곳에 지어진 통영국제음악당은 통영이 비로소 국제적 음악 도시로 변신해 있음을 알게 하는 현장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거의 1년 내내 수준 높은 공연이 기획되고 있었다. 레온 베르벤의 연주도 거의 만석이었는데, 이미 지난 10월과 11월만 해도 장기엔 케라스 첼로 리사이틀과 주세페 알바네네 피아노 리사이틀, 그리고 조수미와 쉬페이양의 합동 공연이 있었으며, 크로노스 콰르텟, 윤이상 국제음악 콩쿠르 입상자 콘서트와 KBS 교향악단이 개최되고 있었다.

그리고 송년 음악제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가 예정돼 있었다. 나중에 이용민 본부장은 나와 동행자를 통영 앞바다 요트 투어에도 초대해 주었다. 통영 출신의 건축가 김상호 씨의 20년 된 작고 오래된 요트였는데, 승선하고 보니 건축가 전 씨와 서울대 후배인 성덕만 씨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통영고 동창생들로, 자신들을 ‘고당회’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무슨 고전연구모임인가 보다 했더니 고스톱과 당구의 준말이란다.

참으로 유쾌한 고향 친구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얼마 전, 이 낡은 요트로 일본의 후쿠오카(福岡)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바다는 청마 시인이 ‘에메랄드빛’이라고 썼던 그 맑은 청옥색으로 잔잔했고, 그 바다의 표면을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했다.

놀랍게도, 서울은 초겨울의 문턱에 들어섰건만, 통영은 아직도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있었다. 햇볕에 적당히 달궈진 바다는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 눈부신데, 요트에서는 파바로티를 비롯한 성악가들의 청아한 곡이 그 수면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바다와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요트에 몸을 싣고 한 번씩 먼 곳으로 나갔다가 돌아온다고 했다. 과연 음악 도시의 시민들답다는 생각을 했다. 통영에서 유독 많은 시인·화가·음악가가 쏟아져 나왔던 것도 바로 이 바다가 통영 특유의 색채가 되고, 언어가 되고, 소리가 되어 끊임없이 예술혼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영은 이제 국제적 음악 도시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강같이 푸근한 바다, 그것도 청옥색으로 빛나는 깨끗한 바다가 있어 음악 도시 통영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앞으로 이 도시에서는 제2, 제3의 윤이상이 나오고 또 다른 청마 시인이 줄을 이어 나올 것 같은 예감을 갖게 된다. 머지않아 통영이 아름다운 풍광으로서뿐만 아니라, 빈과 같은 세계적 음악 도시, 베네치아 같은 예술 도시로 그 이름을 드러낼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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