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엄마 복서’ 박혜수(오른쪽)가 20일 인천 서구 석남동의 성산효체육관에서 훈련 도중 매서운 눈으로 스승 신갑철 관장을 응시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 지난 18일 WBF 女 라이트플라이급 챔프 된 박혜수

친구 따라갔다 복싱 입문
리듬체조·육상선수 경험
운동능력 좋아 쉽게 배워

하루라도 운동 안하면 ‘근질’
출산 6개월만에 글러브 끼고
잠든 아이 옆에서도 몸 관리

5세 연하 남편도 프로 복서
가족들 응원이 가장 큰 힘
다른 체급 챔프도 욕심나요

이미지 크게보기 박혜수(왼쪽)가 힘든 훈련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라는 아들 문성민 군을 안고 있다. 박혜수 제공

세계복싱연맹(WBF) 여자 라이트플라이급(48.89㎏ 이하) 챔피언 박혜수(29)는 ‘엄마 복서’다. 2009년 프로에 입문한 박혜수는 지난해 7월 아들(문강민)을 출산했다. 박혜수를 아는 이들은 엄마가 됐으니 더는 링에 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박혜수는 링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더 악물고 고된 훈련을 소화했다. ‘아들에게 챔피언 벨트를 선물하는 당당한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 그리고 박혜수는 그 약속을 지켰다.

박혜수는 지난 18일 인천계양체육관 실내테니스장 특설 링에서 열린 챔피언결정전에서 열 살이나 어린 중국의 헤이타오장(19)을 10라운드 심판 전원일치 3-0(97-96, 97-94, 97-95) 판정승으로 꺾고 챔피언이 됐다. 출산 후 1년 4개월 만의 복귀전이었지만, 박혜수는 빠른 스텝과 강력한 펀치로 상대를 밀어붙였다. 헤이타오장은 7전승으로 무패행진을 펼치다 박혜수에게 가로막혔다.

지난 20일 인천 서구 석남동의 성산효체육관에서 만난 박혜수의 몸은 멍투성이였다. 팔은 제대로 치켜들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했고, 펀치를 얻어맞은 왼쪽 귀의 고막이 찢어져 병원 치료를 받고 체육관에 나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얼굴을 찌푸린 박혜수는 시커멓게 변한 오른손을 보이면서 “영광의 상처”라고 말했다.

박혜수는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무척 긴장했고 잠까지 설쳤다. 박혜수는 “아이를 낳은 뒤 치르는 첫 경기가 하필 타이틀전이어서 떨렸다”며 “헤이타오장의 동영상을 구해 분석하는데 펀치가 세다는 게 느껴졌고, ‘망신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선수 이전에 엄마이기에 훈련에 전념할 수 없다. 박혜수는 “결혼하기 전엔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운동할 수 있었지만, 아이가 생기고 난 뒤부터는 늘 아이부터 챙겨야 한다”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뒤 훈련하는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체육관에 가지 못한 채 아이를 돌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혜수는 꾸준함으로 엄마로서의 핸디캡을 메웠다. 하루라도 운동을 거르면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스타일. 출산한 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글러브를 끼었고, 어린이집에서 체육관까지 1시간가량을 뛰어다녔다. 집에선 잠든 아이 옆에서 웨이트트레이닝으로 체력을 길렀다. 박혜수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주부가 가장 바쁘다”면서 “전쟁터 같은 집을 치우고 나면 지치기 일쑤였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은 뒤엔 하루도 운동을 거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박혜수는 또래보다 복싱 입문은 늦은 편. 하지만 운동신경은 타고났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리듬체조 선수였다. 육상부 코치의 권유로 ‘재미 삼아’ 출전한 육상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종목을 바꿨다. 20세까지 육상 3000m 장애물, 1만m에서 메달권을 맴돌았다. 하지만 발목을 다치면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21세에 트랙을 떠났고, 지금의 스승 신갑철(59) 관장을 만났다. 신 관장의 아들 신동명(29)은 지난해 전국체전 밴텀급 금메달리스트로 박혜수의 고교 동창. 박혜수는 “동명이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체육관으로 나를 데려갔고, 그때 처음 글러브를 손에 꼈다”고 말했다. 신 관장은 “혜수는 운동능력이 탁월해 마치 스펀지처럼 복싱 기술을 빨아들였다”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달을 만큼 영리하다”고 칭찬했다.

박혜수는 또 ‘부부 복서’다. 5세 연하의 남편은 지난해까지 아마추어로 활동하다 올해 프로로 전향한 문성혁. 남편은 아내를 위해 ‘투잡’으로 이동통신사에서 일한다. 박혜수는 “남편은 ‘너의 꿈이 곧 나의 꿈’이라면서 늘 응원해준다”며 “최대한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남편이 도움을 준다”고 귀띔했다. 남편은 업무를 일찍 마치는 날엔 체육관에 와 아내의 스파링 파트너를 자청했다. 밤늦게까지 훈련이 이어지면 시어머니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를 돌봤다. 박혜수는 “온 가족이 합심했기에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그래도 엄마가 된 뒤 치르는 경기는 쉽지 않았다. 박혜수는 “챔피언결정전에서 8라운드쯤 다리가 풀려 쓰러질 것 같았는데, 어디선가 ‘강민이 엄마 파이팅!’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며 “반드시 이겨 남편, 아들 앞에서 활짝 웃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덧붙였다.

박혜수의 목표는 세계챔피언 벨트를 추가하는 것이다. 박혜수는 “세계 챔피언 벨트 하나에 만족하지 않는다”면서 “다른 체급의 챔피언 벨트를 남편, 시어머니께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박혜수는 강 펀치를 주고받는 사각의 링에서는 서른이라는 나이 부담도 커지고 있다. 박혜수는 “남들은 애도 있고, 이제 서른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면서 “아직 서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혜수는 “35세까지, 아니 몸 관리를 잘해 더 오랫동안 복싱을 할 생각”이라며 “굵은 땀방울과 멈추지 않겠다는 투지로 이 세상의 많은 어머니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인천=손우성 기자 applepi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