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공연의상 만들다가 발레리나 아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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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나의 서양미술사 100 / 김영나 지음 / 효형출판

파인아트(순수미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되는 책이 E 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다. 실제로 이 책은 세간의 호평에 걸맞게 19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8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러나 과연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는 이들이 단지 인문학적 관심으로 이 책을 잡았다면 어떨까. 완독이 가능할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700여 쪽에 이를 정도로 책이 두껍고, 내용이 소설처럼 술술 읽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펴낸 이 책은 우리 미술사학자가 쓴 책으로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보다 더 적합한 미술사 입문서일 수 있다. 우선 시대별로 미술의 흐름을 설명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있다. 그리고 쉽고 재미있다.

책은 저자가 엄선한 작품 100편의 소재와 주제에 따라 미술 속의 신화, 종교, 정치, 휴머니즘, 후원자, 동서교류, 논란, 혁신 등 여덟 가지 장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연표’보다는 ‘스토리’ 중심으로 회화, 조각, 도자, 사진, 건축 등 여러 분야에 대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해설을 시도, 편년체 서술이 지닌 지루함을 벗어나고 있다. 그중에는 우리의 현실과 역사가 반영된 대목도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의) 생 베르나를 넘는 나폴레옹’이란 그림을 놓고 분석하는 ‘통치자의 이미지’ 편도 그렇다.

저자는 “근대에 와서 정치적 이미지에 미술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한 인물은 나폴레옹이었다”며 “한때 우리나라에서 모든 대선 후보가 어린애를 안고 찍은 사진을 선거 포스터에 사용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설명한다. 또 ‘놀데의 조선 방문’ 편에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아프리카 여인 앞에, 마치 가면을 쓴 듯이 서 있는 선교사의 표현에는 조선 시대 장승의 모티브가 사용됐다”며 독일화가 에밀 놀데의 조선방문 사실을 언급한다.

유명 화가들의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와 미술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소개한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피카소와 발레 뤼스’ 편에 나온 피카소 관련 에피소드를 보자.

“피카소는 장 콕토가 대본을 쓴 발레 뤼스(발레단)의 공연에서 의상을 맡았다”고 저자는 운을 뗀 뒤 “두꺼운 종이로 된 입체주의 의상을 입혀 단원들이 거의 움직이지 못해 혹평 속에 공연은 마무리됐지만 이 덕분에 러시아의 발레리나인 올가 호흘로바를 만나 결혼했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고대의 여신상에서부터 현대의 행위미술, 대지미술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100편의 작품을 선정하고 각각의 작품에 대한 글 100편으로 방대한 서양미술사를 그려낸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명확한 답변을 제시한다.

“미술사의 기본은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하나의 작품에는 작가의 창의적·심미적 재능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며, 미술가가 받은 교육·시대적 규범·역사·정치·종교·신화·사회구조가 종합적으로 담겨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인문학적 관점에서 미술 작품들을 본 글이다.”

아버지 김재원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이어 2011년 2월부터 2016년 3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부녀 국립중앙박물관장이라는 흔치 않은 이력을 가진 저자는, 서양미술 연구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박물관장 퇴임 후에도 서울대로 돌아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계속 강의를 했으며 정년 퇴임해 현재는 명예교수다. 448쪽, 2만4000원.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에밀 놀데의 작품 ‘선교사’. 아프리카 여인 앞에 서 있는 선교사의 모습에 우리 장승의 모티브가 반영돼 있다.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