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용호 연세대 교수 국제정치학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막말을 주고받고 북한의 미사일과 미국의 B-1B 전략폭격기가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시위를 벌이는 마당에 우리 정부의 800만 달러 규모 대북 인도적 지원 결정엔 변함이 없다. 그동안 핵무기에 들인 돈이 북한 주민이 2년 동안 먹을 식량을 살 정도라는데, 왜 우리 돈을 들이느냐는 비난이 만만치 않다.

영유아와 모자(母子) 건강을 위한 인도적 지원의 고귀한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다. 또,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북한에 강경과 온건의 이중 메시지를 보내려는 정부의 고충도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오히려 대북 인도적 지원을 압박과 연계해야 할 시점이다. 또한,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보다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에 더 신경을 써야 할 때다. 이달 초 워싱턴DC에서 개최된 한·미 전략포럼에선 어떤 경우에도 전쟁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입장과 미국의 핵우산을 끝까지 믿어 달라는 입장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보였고, 북한의 궁극적 핵 개발 목표에 대한 해석에서도 온도 차가 느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유엔총회 연설에서 대북 압박을 강조하면서도 평화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루는 걸 의미한다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경제와 외교에서 가장 닮으려 노력하는 레이건 전 대통령도 힘에 의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만 말한 게 아님을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북핵 위기의 평화로운 해결을 ‘완곡히’ 당부한 것이다. 문 대통령의 완곡한 주문과는 달리 현시점에서의 대북 인도적 지원은 자칫 의도적인 엇박자로 해석돼 최대한의 대북(對北) 압박을 가하려는 한·미·일 공조에 균열을 초래할 수 있다.

테러 방지책에 대한 한 연구는 테러 행위 자체를 억제하고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테러 단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정치적 목표들을 공략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북한을 상대하려면 북한의 도발에 일일이 행동으로 대응하기보다 그 도발이 추구하는 목표를 공략해야 한다. 할아버지 김일성의 외모로부터 복장, 통치 스타일까지 흉내내며 자신을 김일성의 화신(化身)으로 부각시키려는 김정은은 할아버지처럼 전지전능한 무(無)오류의 지도자로 부각되길 원한다. 무자비한 숙청·처형이나 핵 개발도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 방식과 국방 자위정책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정치와 군사에선 어느 정도 자신의 정책을 구현해 왔지만, 유독 외교와 경제에서의 업적은 아직 미미한 김정은의 최대 과제는 핵과 경제의 병진(竝進)정책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핵·미사일 개발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가 돼 가는데, 경제적으론 영유아의 건강을 국제기구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지난 23일 유엔총회 연설 직후 유엔 인도주의적 대북 지원 기구 관계자들에게 “올해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최고지도자’라면 어린이들 건강도 못 챙기면서 핵 개발에만 매달린다는 이미지는 결코 원치 않을 것이다.

외교정책에선 때로는 뭔가를 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그게 더 현명한 대안일 수 있다. 대북 지원에 대한 비난을 감수할 수 있다면, ‘코리아 패싱’이라는 비난도 감수하며 운전석에 앉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탈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엇박자를 내기보다는 대남(對南) 도발 양상을 예측하고 철저히 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