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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된 역사 / 윤춘호 지음／푸른길

국내 역사학계에서 미시사(microhistory), 생활사, 구술사에 관한 관심이 고조된 건 아주 오래되진 않았다. 이런 흐름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이후 식민사학을 딛고 민족사학을 재건하려는 지속된 경향 속에서 사람들의 구체적 삶이 녹아 있는, 자잘해 보이는, 때론 수치스러운 기록들을 무시한 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구체적 삶의 내용에서 더 실제에 가까운 역사를 복원할 수 있다는 사학적 이론의 영향도 한몫했다.

이 책은 전북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의 역사를 사학을 전공한 그곳 출신 현직 언론인이 구체적으로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자 역시 “우리가 배우고 기억해야 할 것은 저항하고 투쟁했던 역사만으로 충분할까’라는 의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대장촌(大場村)이라는 지명이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1996년 춘포리로 바뀌었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대장촌이라고 부른다.

‘큰 농장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대장촌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들이 이 마을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저자는 일본 특파원으로 갔을 때 당시 대장촌 농장주 가문의 기록 등을 참조하는 등 다양한 사실과 증언을 통해 봉인돼 있던 대장촌의 역사를 열어젖힌다.

만경강변에 자리하며 약 150년의 역사를 가진 대장촌은 지금은 ‘시골’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테너 가수가 찾아와 공연을 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명창 임방울이 동네 환갑이나 혼인 잔치에 수시로 불려올 만큼 문화적으로 개명된 곳이었다.

그만큼 당시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공동체였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일본인 지주들이 곡창인 이 지역의 80%를 매입해 농장을 경영하며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이주했고, 조선인들은 고용인으로 ‘적대적 공존’을 하며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인들의 몇 차례 집단행동이 있었지만, 소작쟁의나 농민운동이 활발하진 않았다. 저자는 스스로 ‘2등 국민’으로 여기며 대장촌에 살았던 지주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세하게 마을의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루는 대장촌의 역사가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자랑스러운 기록은 아니지만, 대장촌이란 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거기에 산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밝히고 싶었다. 저항과 투쟁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304쪽, 2만 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