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계절을 경험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한국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충만한 것은 사계절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아침과 저녁의 바람과 공기가 달라지는 것, 숨 막힐 듯 뜨거웠다가 어느덧 서늘해지는 계절의 흐름은 시간의 변화를 몸소 느끼게 해준다. 한국과 시차는 정반대지만, 한국과 비슷한 흐름으로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도시가 있다. 14시간을 날아 도착하면 비로소 한국에서 출발할 시간쯤이 돼 있는 곳. 필자가 아주 좋아하는 도시, 세계 예술과 패션, 문화의 중심이라는 뉴욕이다.

얼마 전 뉴욕을 찾아 6번가 끝자락의 센트럴 파크 입구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다 맛있는 냄새가 나 옆을 돌아보니, 한 부녀가 나란히 앉아 종이상자에 담긴 피자를 먹는 중이었다. 잠시 후 아빠는 소녀에게 약간의 돈을 주며 음료를 사 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소녀는 지폐를 들고 팔랑팔랑 날아갈 듯 앞에 있는 노란색 간이 푸드 트럭으로 뛰어갔다.

줄곧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던 주인은 환한 미소로 이 귀여운 손님을 내려다보며 “뭐 줄까요” 하고 물었다. 푸드 트럭 안에선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키가 작았던 소녀는 우선 물 한 병을 집어 들고는, 선반을 올려다보며 망설였다. 콜라와 사이다, 아이스티 등 화려한 빛깔의 캔 사이에서 소녀의 작은 손가락이 원을 그리며 한 바퀴 춤을 추었다. 고민 끝에 오렌지 맛 탄산수를 골라든 소녀는 다시 사뿐사뿐 아빠에게 뛰어와 피자를 먹었다. 이 소녀가 알지 모르겠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환한 미소로 이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또 그때 마신 탄산수의 달콤한 맛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으로 소녀에게 기억될지를.

읽던 책을 덮고 마음 가득히 기분 좋은 상태가 돼 공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해가 기울어지며 마천루 사이의 하늘빛을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적절한 온도와 주말 특유의 들뜨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2017년의 가을, 센트럴 파크의 나무들이 짙은 초록에서 옅은 주황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올가을의 시작을 알려준 것은 아기단풍들도 하늘도 아니었고, 바로 센트럴 파크에서 만난 뉴욕의 한 소녀였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급격한 기온 차를 보이고 있다. 이번 가을에는 어떤 계절 사이를 오고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계절 사이에서 많은 분이 행복하도록 더욱 힘차게 비행하기로 다짐한다. 만일, 이번 가을 뉴욕을 찾는 분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센트럴 파크에서 조용히 책을 읽어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바깥에 앉아 책을 읽고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계절이 곧 사라질 것이 아쉽기만 하다.

대한항공 승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