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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 예산정책학

문재인 정부의 첫 예산안이 공개됐다. 주요 내용으로, 총지출은 9년 만에 최대로 늘어 올해보다 7.1% 증액된 429조 원에 이르며, 이중 복지 지출의 비중이 전체 34%, 146조 2000억 원이나 된다. 이를 포함, 필요에 따라 줄일 수 없는 의무지출이 218조 원으로 50.8%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로써 사상 처음으로 의무지출이 50%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예산은 국정철학을 가시화한 문서이자 주요 국정과제의 실현을 위한 재무적인 자원임을 고려할 때, 예산편성의 원칙과 방향의 큰 전환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방향에서 복지·일자리·국방 지출의 확대가 이뤄진 것은 예상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내용으로 보이며, 민주적인 의사가 반영된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그 반면, 이번 예산안은 정치권력의 의사에 지나치게 순응해 국민 전체, 특히 미래 세대의 이익을 훼손한 측면이 강하다. 무엇보다, 이번 예산안은 25조 원 안팎의 적자 국채 발행으로 추가적인 국가채무를 미래 세대에 넘길 예정이며, 달성 불가능한 편향된 세수 추계로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증가를 과소 추계하는 눈속임도 보인다. 복지 공약을 위해 세출 구조조정과 적자 국채 발행을 기계적으로 하는 예산 배분이 과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지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의문이다. 복지 프로그램 가운데서 재량 지출에 비해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더 큰 프로그램도 있지 않을까. 현세대에 수혜가 집중된 돈 나눠주기 프로그램보다 경제 혁신과 사회 발전을 위해, 미래 세대를 위해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소득 주도 성장론에 따른 예산 배분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정책 프로그램이 선순환에 더 이바지할 것인지에 대한 경제학계의 다양한 토론과 고민이 담겨 있는가 하는 문제도 크다.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단순한 스토리를 정책으로 포장한다면 기재부가 경제의 컨트롤타워로서 역할을 방기한 것이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존중하고 이를 예산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정치권의 의사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게 아니다. 단기적이고 즉흥적일 수 있는 시민들의 의사, 부분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의 압력, 선거에 영향을 받는 정치권력의 요구를 재정 전문가로서 재해석하고 국가 전체와 현재 및 미래 세대 모두의 이익에 맞게 절충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국가의 중앙 예산기구는 이러한 역할을 비교적 잘 해왔고 재정 건전성과 산업 및 경제·사회에 대한 투자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해 국가 발전을 이끌어왔다. 헌법적 틀이 제공한 직업관료제의 보호와 집단의 고유 직업윤리, 그리고 조직 문화 속에서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재원 조달과 재정 건전성 유지의 균형을 유지한 예산 배분을 해왔다.

중앙 예산기구가 의도적인 세입 추계 오류로 재정적자 예상치를 낮춘다든지,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비용을 과소 추계함으로써 국가채무를 늘려 미래 세대에 부담을 전가한다든지 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소비 성격의 복지 지출을 늘려 달라는 정치권의 요구에 그대로 순응하고 공공 투자 성격의 지출을 줄여 사회의 생산성은 낮춘다든지, 현재 세대의 이익에 편향된 복지 지출을 확대해 미래 세대의 이익을 침해하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