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오래된 아파트에 마련된 황주리 작가의 작업실. 화사한 색감의 ‘식물학’ 연작이 거실 가운데 놓여 있고 흑백 그림 연작인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뒤 왼쪽 벽면에 전시돼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91) 서양화가 황주리 ‘내 인생의 작업실’

많은 예술가가 그렇듯, 나 자신도 날 때부터 섬세하고 편집적이며 비현실적인 상상력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내 첫 번째 작업실은 어머니의 배 속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꼬물대며 아마도 무엇을 하며 한생을 보낼 것인지 암중모색했던 열 달이 지나고 나는 세상 밖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 후로 한 5년 동안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다섯 살 때쯤부터의 내 작업실의 기억은 서울의 광화문 한쪽 내수동의 막다른 골목 큰 대문 집의, 턱이 높은 마루 위로 올라가 있던 다다미방이다. 안쪽으로 작은 방이 또 하나 있었는데 거기 책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가 발간하시던 ‘신태양’ 잡지가 가득했고 다른 쪽에는 사르트르의 ‘말’, 히틀러의 ‘나의 투쟁’,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 그런 제목의 책이 있었다.

한쪽에는 신태양사라는 한문이 위쪽에 쓰인 빈 원고지가 높이 쌓여 있었는데 그 원고지가 바로 나의 첫 캔버스였던 셈이다. 남들은 원고지에 글을 쓸 때 나는 원고지에 낙서도 하고 비행기도 접고 맨 처음 그림이라는 걸 그렸다. 어린 시절 나는 유난히 말이 없는 아이였다.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 누군가 다가와 “너 벙어리지?”하는 말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벙어리면 어떠랴? 언젠가 오래전에 명동의 어느 찻집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서 수화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무척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원하고 바라던 말이 바로 단 두 사람 간의 ‘수화’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유난히 말이 없는 딸을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조기 미술 개인 교육 덕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모든 미술 실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월요일 조회시간마다 레드 카펫을 밟았다. 그러는 사이 자폐에 가까운 침묵은 치료됐고 나는 낭독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걸 알게 되었다. 수업시간에 자주 시를 낭독했고, 회장 선거에 나가는 공부도 잘하고 잘생긴 급우를 위해 찬조연설도 했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모르는 채 우리는 생을 마감한다. 기억 속의 내 두 번째 작업실은 자유당 시절 정치 깡패 임화수가 살았던 낙원동의 일본식 가옥 2층 서재였다. 그 시절 나는 그곳에서 많은 책을 읽으면서 누구에게나 외로웠을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내 기억 속의 세 번째 작업실은 연남동의 3층 주택 지하실이었다.

대학 3학년쯤 나는 학교 수업을 자주 빼먹는 불량 학생이었지만 나름대로는 이미 화풍을 정립한 화가였다. 그 지하실에서 나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불면증이 있으신 아버지가 갑자기 방문하시는 바람에 담배를 피우다가 들켰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죽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야단은커녕 오히려 담배를 보루로 사다가 던져주고 가셨다.

잠이 안 오는 밤에 아버지는 늘 내 그림과 사랑에 빠진 비평가였다. 작업실로 쓰던 지하실은 꽤 넓어서 아주 큰 그림을 제작하기에도 충분했다. 어느 해인가는 장마가 와서 작업실이 물에 잠겨 캔버스들이 물에 둥둥 떠다녔다. 캔버스를 건지러 온몸을 물에 담근 나는 그때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무래도 화가가 되는 일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독립운동가가 되는 일과도 비슷하다.”

1970년대 말 나는 물질주의적 추상이라고 할 대작들을 제작하느라 학교 갈 시간도 없었다. 잭슨 폴록에 경도된 시절이었다. 물감을 뿌리고 던지고 페인트를 통째로 붓기도 하면서 나는 매일 스무 살의 고독과 씨름을 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금지된 것이 너무 많았던, 그야말로 단색화의 시절이었던 그때 그 시절, 나는 온 세상이 컬러이기를 염원했던 컬러 지상주의자였다.

생명은 곧 색깔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굳이 색을 쓰지 않으려면 왜 화가가 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물론 흰색과 검은색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색깔이며 흑과 백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색깔이 있는 것인지는 서서히 알게 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 지금과는 다른 아주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희망은 나이가 들면서 퇴색해갔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어떤 면으로는 동시에 더 나빠지기 마련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된다.

희망조차 그렇다. 희망은 세월이 갈수록 눈이 높아져 웬만한 세상의 진화에는 눈도 끔쩍 안 하며 계속 불평만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도 곧 알게 된다. 작업실도 마찬가지다. 좁고 허름한 작업실에서 그린 청춘의 그림과 나이 들어 넓고 편리한 작업실에서 그린 그림의 차이는 뭘까?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업실은 그곳이 초라하든, 화려하든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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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가을, 나는 고 류경채 선생이 주관하시던 창작 미술협회 공모전에서 문예진흥원장상을 받았다. 류경채 선생은 전도가 유망하다며 무척 내 그림을 칭찬해주셨다. 수업시간에 매일 야단만 맞던 나로서는 어리둥절한 일이었으나 자신이 옳다는 소신을 가지게 해준 그 시절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결국 예술의 길에 스승은 없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또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어느 기회에 윤명로 선생께 그림을 보여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식으로 그리면 너무 시간이 안 걸려서 그림이 너무 많아지게 되지.” 사실 그 말이 맞는 것이 하루에 100호 한 점, 아니 두 점도 완성이 되니 작업실인 지하실은 더 이상 그림을 놔둘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 말이 내 그림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선생이 아신다면 아마 놀라실 것이다. 그 시간 이후 나는 추상을 버리고 구상의 길로 들어섰다. 진정한 나만의 그림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어린 시절 원고지 위에 낙서를 하던 일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어쩌면 옳든, 그르든 일부러 시간이 많이 걸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도 부분적 진실이다.

그즈음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한 건 유전자상 문학적 재능이 있던 터라 미술평론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때문이었다. 연극을 무척 좋아하던 시절,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던 마르크스 미학에 경도되어 ‘브레히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논문을 썼다가 통과되지 못하고 다음 해 ‘바슐라르의 역동적 상상력’이라는 제목으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갖은 겉멋을 다 통과해 보았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원고지 그림으로 청년작가들의 우상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이 떠오르기도 하는 나의 원고지 그림은 내 젊은 시절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류경채 선생이 내 원고지 그림 전시를 보러 오셔서 혀를 차며 말씀하셨던 기억이 어제 같다. “아니 그 좋던 그림이 왜 이 모양이 되었나?”

예술의 길에 스승은 없을지 모른다. 예술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매 순간 이것이 과연 예술인가 하는 회의와 실험을 딛고 일어서는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하지만 작업실이 싸움터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살아갈 이유를 주었던 텃밭 같은 곳이기도 하고, 상실감에 빠졌을 때 영혼을 위로하는 치료실이기도 했다.

내 인생의 작업실 중 잊지 못할 곳 중에는 번화해지기 훨씬 전의 1980년대 대학로와, 창가에서 내다보이는 자유의 여신상과 벗하던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근처의 작업실, 사랑하는 개 ‘베티’의 초상들과 ‘돌에 관한 명상’ 연작을 남긴 북한산 작업실 등이 있다. 대학로 한가운데 지금은 층마다 호프집이 된 작은 건물 2층이 나의 작업실이었다.

1970년대 말 어머니가 직접 설계를 해서 지은 그 작은 건물은 내 그림의 더없는 후원자이셨던 아버지의 추억이 짙게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감도와 학림다방으로 기억되는 대학로의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나는 아버지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첫 번째와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철없는 마음에 자신이 많이 고독한 줄 알았던 그 시절이 실은 든든한 아버지가 곁에 계셔서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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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뉴욕으로 건너가, 작업실로부터 걸어서 100걸음도 채 안 될 것 같은 거리에 있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질 때까지 나는 뉴욕과 서울에서 작업하며 반년씩을 살았다. 한낮이면 창밖에 허드슨강이 햇볕에 부서지고 해가 지면 석양에 온 하늘이 빨갛게 물들던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그림과 설치 작업을 남겼다.

서울에 와 있던 2001년 9월 11일 저녁,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는데 낯익은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이후 세월은 급류에 휩쓸린 듯 인정사정 보지 않고 흘러갔다. 아버지 다음으로 내 그림을 사랑하던 동생 황정욱이 세상을 떠난 지도 3년이 흘렀다. 가끔 동생이 “이 그림은 나 줄 거지?”하며 씩 웃던 생각이 나서 그 그림엔 ‘황정욱’ 거라고 표시를 해둔다.

내게 있어 하루를 더 산다는 건 하루만큼 작품이 쌓이는 일이다. 작품이 넘쳐 수장고가 항상 모자란 작가이거나, 그림을 쌓아둘 변변한 창고 하나 없는 작가이거나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한다. 그건 상업적으로 아무리 성공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좀 모자라거나, 미쳤거나, 깨달은 도인이거나 여하튼 그런 종류의 사람일 것이다. 60세가 넘어서까지 화가이기를, 조각가이기를, 설치미술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가 누구든, 어떤 작품을 하든 무조건 존경한다.

지금 나의 작업실은 동부 이촌동의 오래된 아파트 건물 안이다. 1980년대 초에 지은 넓고 천장이 높은 작업실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보니 모든 것이 그렇듯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다 따로 있어서 시간이 가고 나면 그때 그 그림은 그리지 못한다. 그게 지금 나의 얼굴이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 귀한 시간에 대한 헌사이다. 그동안 거쳐 온 세상의 각자 다른 작업실은 사연 많았던 시대의 방, 개인적 나이테의 방,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추억의 방이다. 중국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은 세상을 떠나며 아내 쑹칭링(宋慶齡)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대에게 준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우리가 같이했던 집 안의 추억과 집 밖의 꿈을 그대에게 주고 간다.” 전혀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화가에게 작업실은 집 안의 추억이며 동시에 아직은 이루지 못한 집 밖의 꿈이기도 하다. 화가 김환기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캔버스에 찍은 마지막 점을 떠올린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무릇 화가는 손에서 붓을 놓지 말 일이다.

황주리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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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서양화과,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30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200여 회의 기획 단체전에 참가했다. ‘글을 잘 쓰는 화가’로도 유명하며 얼마 전 두 번째 그림소설집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