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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서 여행하는 이유 / 올리비에 블레이즈 지음, 김혜영 옮김 / 북라이프

인류의 진화 단계에서 사피엔스(현생인류) 전에는 에렉투스가 있었다. 약 150만 년 전에 등장한 에렉투스는 직립보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두 발로 걸음으로써 손과 머리를 쓸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에렉투스의 유전자를 받은 사피엔스는 걷고 만들고 사유함으로써 자신보다 크고 위협적인 동물을 제치고 지구상 최고이자 최후의 지배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수백만 년 전 에렉투스에서 기원한 걷기 유전자는 21세기 현대인의 혈관 속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다. 다만 에렉투스가 수렵과 생존을 위해 걸었다면, 현대인들은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걷는다. 걷기는 인간 본성에 가장 충실한 행동이자, 일상에 파묻힌 인간을 더욱 자유롭게 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프랑스에서 ‘당대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저자도 걷기 마니아다. 평소 지구의 생김새에 관심이 컸던 저자는 우주에서 루나오비터 1호가 찍은 ‘지구돋이’(Earthrise) 사진을 본 후 ‘걸어서 세계일주’를 결심한다.

여기까지는 걷기 혹은 세계적인 트레킹 명소에 관한 경험을 담은 책의 시작과 같다. 캐나다 출신의 도보 여행가 장 벨리보는 11년을 길 위에서 보낸 끝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고, ‘아름다운 방랑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까지 고대 실크로드를 걸어서 정복했다. 이 밖에도 인터넷 블로그에는 직장까지 포기한 채 길고 험난한 여정에 뛰어든 도보 여행자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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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자의 도보 여행은 두 가지 점에서 이것과 다르다. 첫째는 자신의 본업을 그만두면서까지 ‘올인’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특별하고 거창한 목적이 없다는 것.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은 이렇다. 저자는 프랑스의 조그만 마을인 팡플론에서 리옹과 알베르빌을 거쳐 안데르마트(스위스), 트레센다와 베네치아(이상 이탈리아), 두브라바 크리조브얀스카(크로아티아), 미슈콜츠(헝가리)까지 5개국 8개 도시의 약 2000㎞를 직전 여행이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방법으로 걸었다. 즉, 팡플론에서 리옹까지 약 500㎞의 첫 구간을 약 한 달간 걸어서 주파하고, 다음엔 리옹에서 출발해 알베르빌까지 두 번째 구간을 걷는 식이다. 책에는 총 7구간이 나오는데 저자는 2010년부터 1년에 한 번씩 한 구간을 걸어서 완주했다.

이렇게 하면 누구든지 세계일주에 도전할 수 있다. 걷기 위해 회사를 휴직하거나 사표를 낼 필요는 없다. 1년에 한 번 휴가 기간에 그 시간만큼을 걷기에만 투자하면 된다. 엄청난 시간과 돈 때문에 도보 세계여행을 꿈으로만 간직하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모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걷는 목적의 측면에선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걷기를 본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목표를 내세운다. 지구 환경 보호라든가, 자신과의 싸움이라든가 거기엔 크고 작은 목적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마저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가 떠난 이유는 지구 온난화 경고도, 난민 해결도, 인종 차별 철폐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걷고 싶었다. 목적은 그다음의 문제였다. 저자는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긴 도보 여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계 평화를 위해 고문에 반기를 든다는 의미로 걸어야 할 것 같았다”면서 “사실 나의 세계일주는 궁극적인 목적이 따로 있지 않다. 단지 나를 위해 끝까지 해내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라고 말했다.

처음 출발하는 대목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계획 없이 거대한 여행에 나섰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여행 직전까지도 출발점을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작은 마을 팡플론에서 온 행사 참석 요청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을 시작점으로 정했다.

준비 부족에 특별한 목적 없이 시작한 여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먹고 자는 문제, 체력, 짐승의 위협, 사나운 날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걸으면서 자유를 느꼈고, 비로소 자신의 삶이 어딘가로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그가 걸었던 이유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