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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역을 호령하던 산중의 왕이 ‘호랑이’다. 그러나 지금 남한의 산림에서는 호랑이를 볼 수 없다. 1922년 경북 경주시 대덕산에서 잡힌 수컷 1마리를 끝으로 남한에서 호랑이는 사라졌다. 호랑이가 떠난 자리에는 호랑이의 주된 먹잇감이던 ‘멧돼지’가 들어와 버젓이 왕 노릇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의 역사는 아주 깊지만, ‘호랑이’라는 단어의 역사는 그리 깊지 못하다. ‘호랑이’라는 단어는 18세기 문헌에서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범’이라는 단어가 줄곧 쓰여 왔다. ‘범’은 고려 시대 문헌에도 나올 정도로 역사가 깊은 단어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 속의 ‘범’을 ‘호랑이’로 대체하기 어려운 것도 ‘범’이 아주 일찍부터 일상적으로 쓰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호랑이’는 ‘호랑’에 접미사 ‘-이’가 결합된 어형이다. ‘호랑’은 한자어 ‘虎狼’으로, 이는 ‘범과 이리’라는 뜻이다. 곧 ‘虎狼’은 ‘범’과 ‘이리’라는 두 종류의 동물을 함께 지시하던 단어였다. 이는 ‘시랑(豺狼)’이 ‘승냥이’와 ‘이리’를 아울러 지시하던 것과 같다.

그런데 ‘虎狼’은 ‘虎’와 ‘狼’ 가운데 ‘虎’에 무게가 실리면서 ‘虎’의 의미로 변한다. ‘호랑’의 의미가 ‘虎’로 변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호랑이’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하는 18세기 이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호랑이’는 정확히 말하면 ‘虎’의 의미로 변한 ‘호랑’에 접미사 ‘-이’가 결합된 어형이다.

이렇게 보면, 18세기 이후 얼마 동안은 ‘호랑이’를 뜻하는 단어로 ‘범’ ‘호랑’ ‘호랑이’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호랑’은 ‘호랑이’에 밀려나 세력을 잃고 사라졌다. ‘호랑’의 흔적이 북한어에 남아 있다. 아직 ‘범’은 살아 있지만, ‘호랑이’에 밀려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처지이다.

충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