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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창문을 열어 놓고 드리퍼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황금빛 커피 방울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향기로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염색을 너무 진하게 하였지만―노인의 염색은 노인을 철없이 만들 뿐 아니라 어쩌면 이곳의 ‘간판 문화’를 대변하는 듯하기도 하고, 또는 귀밑머리 흴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이들을 조롱하는듯도 하다―둥지에서 닭들이 막 낳은 따뜻한, 알을 꺼내주는 그녀. 그녀의 쉰 듯한 느려 터진 목소리가 커피 방울 사이로 또옥또옥 떨어진다.

“강 선생님, 달걀을 몇 개 드릴게요.”

그녀는 뒤뜰로 간다. 내가 쭐레쭐레 따라가면 그녀는 닭장 한구석에 놓인 둥지에서 알을 꺼내어 나의 가방에 넣어준다. 가방이 따뜻해진다. 닭들은 아마도 자기의 알을 빼앗겨서 순간 슬프겠지만 그 희디흰, 혹은 연한 살색 알의 따뜻한 온기는 내게 향기의 온기로 다가든다.

80이 낼모레지만, 수영장에서 라인을 20바퀴(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돌고, 샤워실에서 나를 지나가다가, 내 등을 말없이 시원히 닦아주고 가는, 손힘도 센 그녀.

마흔이 되도록 세 살짜리 어리광을 피우는, 자라지 않는 병에 걸려 있는 장애인 아들을 평생 업어 키우다, 나중엔 가진 돈도 다 떨어져 시장에서 고사리를 팔던, 결국은 장애인을 국가에서 돌봐준다는 나라를 향하여 떠난 그녀. 자기를 밀어낸 고향이지만 그리워, 결국 고치지 못할 상사병에 걸린 그녀.

몇 푼 못받는 간병비이지만, 늘 장애인의 머리칼을 예쁘게 빗어내리는, 늘씬한, 미스코리아처럼 아름다운 그녀.

향기롭지 않은 이 시대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러나 정신없이 향기로운 그녀, 또는 그들의 향기를 본다, 듣는다.

물 없이도 10년도 넘게 기다린다는 새우의 그 마른 호수의 밑바닥에서 빛나며 있는 기다림의 향기. 물 없이도 얼마인가를 말없이 견딘다는 바리나무의 그 말 없는 뿌리.

그 신부님은 열두어 명의 신자를 모아놓고 일요일이면 미사를 드렸었다. 그리고 예수와 근동시대에 관해 얘기하셨다. 로드(Lord)라는 말도, 고해성사라는 성사도 구약에는 없다고 하시면서 나의 ‘고해’를 받지 않았다.

작가 트루니에의 말이던가.

더 이상 그대가 내 몸을 건드리지 않을 때, 그것이 어둠이구나.

이란의 여류 시인 파로흐자드는 ‘사랑하는 이여/내 집에 오려거든/부디 등불 하나 가져다 주오/창문 하나를//행복 가득한 골목의 사람들을 엿볼 수 있게’ 하고 노래했다. 파로흐자드의 시를 읽으면서 그래, 향기는 어둠 속을 날아가는 등불의 날개 같은 것이구나. 그 날개짓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구나, 중얼거린다.

하긴 요즘엔 향기를 파는 가게도 있다. 그러나 이 향기들은 ‘보이는, 또는 은은하게 들리는 향기’가 아니다.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는 향기이다. 생각건대 시끄럽고 큰 목소리가 늘 울려 정신이 없는 우리 사회가 그래도 지금 이렇게 굴러가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그러나 은은하게 들리는 향기’ 때문이리라. 장님의 몸을 끊임없이 껴안는 포옹 때문일 것이다.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아로마 향기가 아니라, 들리는 향기, 보이는 향기.

시인 안도현의 어법처럼 당신은 그런 향기를 누구에겐가, 어느 순간엔가 ‘보이고, 들리게’ 하고 있는가. 파로흐자드의 등불을 켜고 있는가. 창문 하나를 가져오고 있는가.

언젠가 나는 썼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향기를 풍긴다. 벌레소리, 종소리, 따뜻한 밤 자동차의 불빛…’

또 이렇게도 썼었다.

‘지난 어느 하루의 여름밤을 기억해보라, 어디서인가 달려드는 색-색하는 소리, 낯모르는 벌레들의 날개부비는 소리, 가슴 서로 부딪는 소리…지극히 작은 것들의 이 세상을 향한 손짓 같은 소리에 당신을 맡겨보라. 그 소리에 감동하여보라. 작은 것들의 작은 숨소리에 감동하여보라.’



‘들리지 않는 것들의 향기를 들어라.

너의 방을 보이지 않는 향기로 가득 채워라.

들리지 않는 것들의 향기로 너의 귀를 가득 채워라



벌개져 오는 하늘 한 끝의 소리를 들어라.

새들이 모두 그쪽으로 날기 시작한다.

새들의 날개 소리를 들어라.

새들의 울음소리가 지구를 들고 가는 걸 보아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진한 향기를

삶의 향기를 보아라.―모든 부드러움이 마치 흐르는 물처럼 시간 속으로 달려들어가 세계의 틈새를 막는 것을 보아라.’

(필자의 산문집 ‘사랑법’ 중에서)



그러고 보니, 나에게 무엇인가를 준 사람만을 나는 향기롭다고 하고 있구나. 이렇게 이기주의구나. 아, 나는 순간순간 이 이기(利己)에서 벗어나야 한다. 작고 하찮으나, 여름밤의 벌레 소리처럼 사소하고 사소하나 향기로운 사람들. 어디서인가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그들을 세어낼 수 있는, 그 수효만큼 너의 삶은 향기로워지리라. 살 만한 삶이 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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