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이 지난 27일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건물 옥상 휴게실에서 2003년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 시절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대통령선거 공약을 추리고 인사 검증을 했던 2003년 당시와 달리 이번에는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 틀을 잡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벤처 창업 혁명’論

‘리스크 테이커’였던 대기업
지금은 ‘리스크 매니저’그쳐
벤처 일으켜 경제 활력 줄 것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재벌 중심 경제를 너무 오래 끌고 오다 보니 우리 경제가 노쇠해졌다”며 “경제에도 젊은 피 수혈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제시한 젊은 피 수혈 방법은 ‘벤처 창업 혁명’이었다. 벤처 창업 혁명이야말로 경제 전체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재벌의 혁신까지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성장의 지체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등 경제 분야 요직을 모두 거친 김 위원장이 내놓은 해법은 결국 민간의 혁신인 셈이다. 벤처 창업 혁명이 가능하도록 법·제도를 정비하고 지원 체계를 갖추는 데 역량을 집중하는 게 정부에 떨어진 과제인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 성장을 주도해 온 재벌의 현주소에 대한 김 위원장의 진단은 냉정했다. 그는 “지난 30~40년 동안 우리 경제를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경험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재벌들이 이 상태로 간다면 10년 내에 다 쓰러질 것 같다”고 말했다. 재벌들의 위상과 한국의 경제 구조와 세계 경제 흐름 등 모든 게 큰 변화를 맞는 동안 재벌들은 혁신형 투자라는 전략으로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재벌들은 선진국 기업들의 ‘퍼스트 팔로어(first follower)’로서 고속으로 성장했지만, 각 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다투게 된 지금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위치가 바뀌었다”며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를 위한 혁신형 투자를 안 하고 있으니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김 위원장은 현재 경영 일선에 있는 재벌 3·4세들이 창업주들의 ‘적수공권(赤手空拳·맨손과 맨주먹) 정신’은 계승하지 않은 채 재산만 물려받았다고 질타를 이어갔다. 그는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 전 회장, 삼성그룹의 이병철 전 회장 등은 ‘맨손으로 시작했으니 맨손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식의 모험 정신으로 도전을 마다하지 않은 ‘리스크 테이커(risk taker)’였던 반면 재벌 3·4세들은 물려받은 재산을 날릴까 두려워하는 ‘리스크 매니저(risk manager)’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리스크 매니저가 되다 보니 모험이 될 수 있는 투자는 기피하고 그야말로 ‘안전빵’으로 돈만 된다면 일감 몰아주기나 골목상권 침해까지 마다하지 않게 됐다”고도 했다.

재벌의 자발적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는 그의 진단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경제 주체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김 위원장은 재벌 기업의 풍부하고 우수한 인적 자원이 벤처 창업 혁명의 주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10대 재벌 기업에 약 200만 명의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이 몰려 있는데, 오너의 니즈(needs)를 충족하고 영달을 누리느라 자신이 가진 역량의 절반도 못 쓰고 있다”며 “과거 1970년대 율산그룹, 제세산업의 사례처럼 능력 있는 엘리트들이 뛰쳐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 경제에 새 피가 돌게 하려면 벤처 창업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자 문재인 정부의 강조점”이라며 정부의 법·제도 개선과 지원이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번 실패하면 3대는 물론 친척, 친구까지 다 망하는 지금의 구조에서는 성공 확률 5%밖에 안 되는 벤처 창업을 유도할 수 없다”며 “두 번, 세 번 실패해도 재기 가능한 벤처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술과 투자가 결합한 미국식 인큐베이팅 금융 시스템 도입, 성과를 낸 벤처 창업가들이 곧바로 시장에서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기업 인수·합병(M&A) 활성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이런 성공 사례들이 나오면 재벌 오너들도 유능한 전문 경영인을 영입할지, 자신이 혁신형 투자에 나설지 결단해야 할 것”이라며 재벌 혁신에 대한 기대감도 표했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