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윤태호 작가는 작가로서 나이를 먹어 좋은 점은 받아들이는 그물이 촘촘해져 사소한 이야기를 들어도 예민하게 걸러낸다는 것이라며 독자들의 무의식까지 관리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김동훈 기자 dhk@

- 교양만화 ‘오리진’ 연재 시작

단행본 100권짜리 10년 기획
하루 2~3시간 자고 작업 몰두
오류 있으면 안돼 팀이뤄 협업

“내삶은 언제나 라이브의 연속
지겹거나 슬럼프 빠질 새 없어
40대 후반, 좀 더 말랑해져야”

만화가 윤태호(48) 작가가 10년, 단행본 100권짜리 대형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시간과 분량도 만만찮지만 세상의 지식과 교양의 기원을 담아내는 교양만화라는 점이 더 놀랍다. 윤태호라면 ‘야후’ ‘이끼’ ‘미생’ 등 사회성 강한 주제와 구조와 운명 속에서 분투하는 인간의 내면을 담아낸 이야기로 각인됐기에 교양 만화라니 좀 의외다. 소설가가 대형 교양 인문서 기획에 나선 느낌이랄까.

그는 인문, 사회, 과학을 가로지르며 지식의 기원을 탐구하는 만화 ‘오리진’을 최근 위즈덤하우스의 웹툰·웹소설 플랫폼 ‘저스툰’에 주 1회 연재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미생 2’도 연재 중인 그는 요즘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마련된 오리진 사무실에서 하루 2∼3시간 눈을 붙이고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노동 강도가 지속 가능한지 물었더니 그는 1993년 만화 ‘비상착륙’으로 데뷔한 뒤 줄곧 작업에 들어가면 주 3일 몰아서, 그것도 하루 2∼3시간만 자는 패턴을 계속해왔다고 했다. 처음엔 생계를 위해 그리했다지만 유명작가가 된 지금도 변함없는 그를 지난 9일 동교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오리진’을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 바람으로 정리됐다. 지식에 대한 남다른 열망과 작가로서의 자연스러운 도약이다.

어려서부터 만화만 그리고 공부를 안 해 ‘무식에 대한 공포’가 있다는 그는 작품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사라지는 지식이 아쉬웠다고 했다. “작품을 위해 취재하고 책 읽고, 사람을 만나며 사전 조사하다 보면 하나 하나 알아가는 쾌감이 있다. 내가 나아지고 있구나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만화가 끝나고 나면 체계적이지 않아서인지 곧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체계적 지식을 위한 본격 작업인 ‘오리진’은 먼 미래, 과학의 발달로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만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자 과학자들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기 위해 로봇을 21세기에 보내 인간의 지식에 대해 학습하게 한다는 설정이다. 만화는 첫 주제 보온(保溫)을 포함해 100개 주제를 다룬다. 이들 지식과 정보는 ‘봉투’라는 이름의 로봇, 봉투와 함께 살아가는 한 소녀 가족이 만들어가는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풀려 나온다.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팀과 함께 움직인다. 편집자 5명과 토론하고 분석하며 주제를 정하고 스토리를 짠다. “오리지널한 작품을 팀으로 한다면 어렵겠지만 지식 만화는 오류가 있어선 안 되기에 체크해야 한다. 독학으로 성장해 왔지만 이젠 다른 이의 조언이나 분석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만의 말투, 비문 같은 것도 고치게 됐다. 50이 되기 전 적절한 타이밍, 적절한 리빌딩 과정이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도약의 빈도와 높이가 줄어든다며 이번 작업이 만화를 왜 계속해야 하는지 답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오리진과 함께할 10년이 자신에게 결정적 시간이라고 했다. “남자 나이 40대는 가장 근력이 좋을 때다. 원숙해지고 확신도 생기고, 어떤 작업도 버틸 근력이 있다. 나도 40대에 ‘이끼’ ‘미생’ 같은 작업으로 힘을 받았다. 100세 시대라지만 객관적으로 작가로서의 시간은 10년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그래서 ‘오리진’ 작업을 하면서 ‘미생 2’를 빨리 마무리하고, 그외 하고 싶은 몇 가지 작업을 병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25년 동안 꾸준히 달려와 ‘국민만화가’의 명성을 얻은 그에게 슬럼프에 대해 물었다. 그런 일은 별로 없다고 했다. “내 삶은 언제나 임시변통이었고 라이브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가 설명한 이유이다. 언제나 세팅이 안 되고 고정된 것 없이 스토리가 잘 풀릴 때도 있고 안 풀릴 때도 있고, 그러다 보니 들쭉날쭉해 지겹거나 슬럼프에 빠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모든 일은 습관이라는 그는 그림이 잘 안 될 때, 슬럼프에 빠지기보다 손을 안 쓰는 방향으로 그리고 또 그리며 연습을 한다. 그렇게 계속할 뿐 특별한 목표도 정해 두지 않는다고 했다. 특정 지점보다는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신의 미션이라고 했다. 그래서 작가로서의 그의 다짐은 이렇다. “40대 후반은 견고해질 대로 견고해질 나이다. 더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