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한때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필자의 글 ‘사람과 소나무’를 줄이고 또 줄여서 일부만 옮겼다.

“우리 조상들은 솔방울은 물론이고 삭정이와 늙어 떨어진 솔가리를 긁어다 땔감으로 썼고, 밑둥치는 잘라다 패서 군불을 땠다. 그뿐인가. 옹이진 관솔가지는 꺾어서 불쏘시개로 썼고, 송홧가루로는 떡을 만들었으며, 속껍질 송기(松肌)를 벗겨 말려 가루 내 떡이나 밥을 지었고 송진을 껌 대신 씹었다.… 솔잎 태우는 냄새는 막 볶아낸 커피 냄새 같다고 했던가.… 무덤을 지키는 나무 또한 소나무가 아닌가. 죽은 이는 또 어디에 누워 있는가. 소나무 널빤지로 만든 송관이 저승집이다.… 늘 푸름을 자랑하는 소나무에는 영양소와 함께 우리의 넋이 스며 있다.… 이처럼 인간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소나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 ‘금줄의 솔가지에서 시작하여, 소나무 관속에 누워 솔밭에 묻히니, 은은한 솔바람이 무덤 속의 한을 달래 준다.’”

더욱이 요새 와선 솔잎이나 솔 새순(筍)이 몸의 피돌기를 원활히 해준다 하여 사람들이 솔잎 즙을 짜서 음료로 만들어 팔기에 이르렀다. 그 물이 달콤하기 그지없으니 이는 설탕과 비슷한 과당이 많이 든 때문이다. 또 솔잎에는 배탈이 났을 때 좋은 타닌(tannin)도 그득 들어 있다.

‘송무백열(松茂柏悅)’이란,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반긴다는 뜻으로, 친구의 잘됨을 기뻐한다는 의미다. 이 말에서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벗으로 비유했으나,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 둘은 사촌 형제뻘이다. 소나무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가 있으니, 이파리가 2개씩 뭉쳐(叢生·총생)나는, 세세연년 우리와 같이 살아온 소나무(Pinus densiflora)와 잎이 3개씩 뭉쳐나며 짧고 뻣뻣해 거칠어 보이는 북아메리카 원산인 리기다소나무(P. rigida), 잎사귀가 5개씩 뭉쳐나는 잣나무(P. koraiensis)이다.

늦가을에 뒷산에 들면 마침내 초록빛을 잃어 누렇게 물든 조락한 솔잎들이 한가득 붙어 있다. 그런데 활엽수는 봄 잎을 가을에 죄 떨어뜨려 이내 벌거숭이가 되지만, 청솔은 올해 것과 지난해 것은 고대로 있고 대개 지지난해 것이 떨어진다. 그래서 소나무 숲이 한겨울에도 늘 푸름(晩翠·만취)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솔잎 표면적을 일일이 계산하면 활엽수 잎의 증발면적을 앞지르니, 여우비 오는 날 소낙비 비가림막으로 소나무 밑이 참나무보다 한결 이롭다.

그런데 추석이 일찍 들면 햅쌀 대신 오려논(올벼를 심은 논)에서 풋바심한 쌀로 송편을 빚는다. 송편을 찔 때 솔잎을 까는 것은, 솔의 향도 향이지만 솔잎에 든 파이토알렉신(phytoalexin)이라는 항생물질로 송편이 부패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얼마나 지혜로운 과학적 송편인가. 그리고 소나무도 다치면 피를 흘린다. 천 년이면 벌레 든 호박(琥珀)이 되는 송진이 굳어 상처 부위를 틀어막을뿐더러 항생제 성분이 나무 부패를 예방한다. 이런 여러 항균 물질이 바로 피톤치드(phytoncide)다.

또, ‘거목 밑에 잔솔 못 자란다’란 ‘잘나가는 아버지 좋은 자식 두기 걸렀다’는 말과 상통한다. 실제로 소나무 뿌리는 갈로타닌(gallotannin)이란 물질을 분비해 애송과 딴 푸나무들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어미나무가 짙은 그늘을 지워 솔 씨의 싹트기(發芽·발아)를 못 하게 하기에 모수(母樹)를 자르고 나면 센 빛을 받아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지세(雨後竹筍之勢)로 애솔이 솟아난다. 이렇든 저렇든 노거수는 의연하고 넉넉한 품새를 풍기는데, 어이하여 사람은 늙고 낡을수록 추레한 몰골을 한담.

소나무는 암수한그루로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따로 핀다. 올해도 흩날리는 최루탄 같은 싯누런 송홧가루 탓에 고역을 겪어야 했다. 몇 개 안 되는 꽃가루받이를 위해 그 많은 꽃가루를!? 암꽃은 새 줄기 꼭대기에 열리고, 바로 아래의 수꽃이 샛노란 꽃가루(松花·송화)를 만든다. 그리고 우듬지에 달린 적자색의 똥그란 젖꼭지만 한 것이 올봄 암꽃이고, 한 마디 아래에 있는 풋 열매가 지난해 것이며, 그 아래 마디에 비늘(松鱗·송린, seed scale)을 쩍 벌리고 있는 마른 송실(松實)이 지지난해에 열린 것이다. 한 가지에 3년 치 솔방울이 줄줄이 맺혔더라!

‘못된 소나무에 솔방울만 많다’고, 매우 거친 땅의 소나무들은 솔방울을 주체할 수 없이 잔뜩 매달고 있다. 생육조건이 좋지 않아 머잖아 삶을 마감해야 하는 터라 서둘러 후손을 남기려고 그 많은 송과(松果)를 조롱조롱 매달고 있다. 이는 노송(老松)의 절절한 종족 번식의 비원(悲願)이렷다. 근데 솔방울은 축축하면 송린이 닫히고, 마르면 쩍쩍 퍼져 벌게 되는데 이렇게 온도나 습도에 대한 반응을 ‘솔방울 효과(pine cone effect)’라 한다. 그래서 깨끗이 씻어 물에 푹 담근 솔방울을 한 바구니 방구석에 놓아두면 머금었던 물기를 뿜어대니 천연 가습기가 된다.

자연은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만 눈길을 주고, 알려는 이에게 비밀의 문을 열어준다. 평생 한다 한다면서 미뤄온 일을 얼마 전에 드디어 하였다. 솔방울(松子·송자)의 자잘한 비늘 조각을 낱낱이 헤아렸으니 작은 방울은 93개, 큰 것은 115개로 한 송아리에 평균하여 자그마치 100여 개였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솔방울 비늘 속의 씨들은 얇은 막 날개로 팔랑개비처럼 팔랑팔랑, 뱅글뱅글 돌면서 멀리멀리 퍼져 날아간다(散布·산포). 얼추 멧새들의 먹이가 되지만 나머지는 애솔이 되기도 한다.

오늘따라 소나무 가지에 스치는 솔바람 소리가 유달리 융융거린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우리 소나무 만만세(萬萬歲)!

이미지 크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