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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논설주간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 구호는 ‘나라를 나라답게’이다. 정상적 나라가 아니라 ‘헬조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최빈국에서 건국·산업화·민주화를 거쳐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나라와, 문 대통령 마음속의 나라는 다른 나라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 및 이를 주도한 세력을 겨냥해 ‘구체제 질곡’ 등 적대적 규정도 서슴지 않았다. 적폐 대청소나 주류 교체는 그 연장선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성취를 이룬 나라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을 뿐이다. 취임과 동시에 각국 정상들로부터 러브콜이 쏟아지는 것은, 문 대통령이 벌써 훌륭한 지도자여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이미 훌륭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간의 발언들이 선거용 구호에 그칠지, 국정 기조로까지 이어질지 불투명하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새 정부는 과거 청산형(型)과 미래 지향형 사이에서 판가름날 것이다. 대통령이라면 ‘위대한 조국’ 인식을 갖는게 당연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다.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6·10 항쟁을 기점으로 할 때 이제 30년 됐다.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임기 말 현상을 겪고, 퇴임 후에도 풍파에 휩싸였다. 이를 뒤집으면, 차기 세력은 현직 대통령의 힘이 빠지면 흔들기 시작하고, 집권 뒤에는 전임을 가차 없이 청산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5년 뒤엔 본인이 당한다. 모두 ‘과거형’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전·후 정권 사이에 일정한 갈등은 존재하지만 한국의 경우엔 유독 심하다. 정권 교체가 반복되면 ‘진폭’이 줄어드는 게 정상인데, 되레 확대되는 양상이다. 이런 대통령제 문화는 국정 경험의 전승을 막고, 국론 분열과 국가 에너지의 낭비를 초래한다. 어제와 그제 4명의 전·현 대통령 사이에 전개된 물고 물리는 듯한 상황은 상징적이다.

그래도 문 대통령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 같아 다행이다. 탕평·통합 인사와 과감한 소통 행보는 전임자의 불투명한 권력 행사와 대비되면서 80%를 넘는 여론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보수 정치권이 지리멸렬하지만 이 분열은 머지않아 선명 경쟁으로 전환된다. 1년 뒤 지방선거와 겹치면 ‘협치’는 환상임이 드러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의 ‘4대강’보다 ‘초기 실패’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지 모른다. ‘핵심관계자’로 통했던 이동관 전 홍보수석은 당시를 회고한 저서 ‘도전의 날들’에서 531만여 표라는 ‘당시 기준’ 사상 최대 표차에 따른 착시 때문에 여론의 흐름을 간과하게 됐고, 광우병 시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실패로 이어졌다고 반성했다.

이번에 문 대통령이 표차 기록을 경신했다(557만여 표). 그러나 그 의미를 오독(誤讀)해 과거 청산과 이념 대결을 불사한다면 금방 곤경에 처할 것이다. 대북 정책 선회, 국정교과서 폐기, 사법부 좌편향 시도, 성과연봉제 폐지, 전교조 합법화 움직임, 대학 평준화, 비정규직 제로 등 전임 정부 뒤집기는 신중하게 종합적 안목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낭패에 봉착할 수 있다. 보수 정치권에 재결집과 총반격 기회를 제공하는 셈도 된다. ‘이명박·박근혜 9년 집권 적폐청산’을 공약집의 맨 앞에 올려놨으니 어쩔 도리가 없을지 모른다.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어떤 개혁이냐가 중요하다. 한(恨)풀이식이라면, 지지층을 결집시킬 순 있겠지만 국민 통합을 이뤄내긴 힘들다. 문 대통령 공약을 보더라도 성장과 창출보다 분배와 청산 쪽이 훨씬 많다.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그런 공약은 금방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코드와 이념을 앞세운 개혁은 진정한 개혁이라고 하기 힘들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역저 ‘한국의 자본주의’ 결론 부분에서 “한국에 당장 필요한 개혁에는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가 별반 의미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 함께 일했던 전문가 중에 많은 사람은 보수 정권에 참여했다고도 했다. 노무현 정부 5년 내내 정책을 총괄했던 김병준 전 정책실장 역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저서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에서 ‘편가르기’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진대제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의 발언을 소개했다. “기업에 있을 땐 미래를 생각하느라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는데, 장관이 되니 과거 이야기를 하느라 미래를 생각할 틈이 없다.” 지금도 유효한 일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