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지난 20일 교보빌딩 9층 회의실에서 광화문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서울국제문학포럼’ 訪韓… ‘노벨문학상’ 알렉시예비치 심층 인터뷰

“인류의 발전에서 급진적 혁명보다는 단계적 진화를 믿는다. 혁명은 자칫 ‘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평화롭게 진행된 한국의 촛불 시위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벨라루스의 소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9)를 지난 20일 광화문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교보빌딩 9층에서 만났다. 알렉시예비치는 교보생명과 교보문고가 후원하고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해 23∼25일 열리는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처음 방한해 19일 공동 기자회견을 한 후 이날 문화일보와 따로 만나 2시간 넘게 심층 인터뷰했다.

알렉시예비치는 “급격히 발전하는 한국에 꼭 와보고 싶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광화문 광장을 봤을 때는 그저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간 이곳에서 벌어진 정치적·혁명적 사건을 듣고 나서 감흥이 남달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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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예비치를 널리 알린 첫 작품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년)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일에 맞서 싸운 옛소련(러시아)의 역사를 참전 여성의 시선에서 기록했다. 그건 흔히 묘사됐던 기존의 ‘전쟁 영웅주의’를 뒤엎는 충격이었다. 참혹한 현실이 솔직하고 생생한 증언으로 구성돼 큰 울림을 줬다. 그의 증언문학엔 ‘목소리 소설’이라는 찬사가 붙었다.

그런데 그가 기록한 전쟁은 어찌 된 까닭인지 한국 현대사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 비극적 참상이 마치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중 우리의 모습 같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전쟁의 양상은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화적 차이로 인해 나라마다 상처 입는 부분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내 작품이 관심을 받은 것도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시각에서 전쟁을 기술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꺼냈다. 노벨상 수상 작가라면 제대로 ‘밝혀’ 줄 것 같았다. 그는 은근히 작가적 욕심을 드러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알고 있다. 그걸 소재로 쓸 수 있다면 좋겠다. 틀 안에 있던 아이디어를 밖으로 터뜨리는 방식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직 증인들이 생존해 있을 때 이뤄져야 한다.”

알렉시예비치의 작품 중 한국적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또 있다. 2013년에 발표한 ‘세컨드핸드 타임’이다. 이 작품은 공산체제 붕괴 20년 후 옛소련의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전쟁 체험 세대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전체주의와 독재의 잔재가 여전하고, 사람들은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2010년 벨라루스 대통령 선거에서 ‘유럽의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4선에 성공하자 반발하며 거리로 나서는 시민들의 모습은 마치 1980년 5월의 광주를 보는 것 같았다.

“혁명은 사회나 체제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사회주의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고국 벨라루스 같은 곳에서는 혁명이 자칫 피를 부를 수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광장에서 보여준 국민의 평화적 힘을 높게 평가한다. 한국은 이미 민주적 바탕이 있기에 평화로운 교체가 가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알렉시예비치는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런 역사적 진화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정부나 관료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정치인들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도 이뤄져야 한다.”

전쟁뿐만이 아니다.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목소리’(1997년)를 통해서는 핵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러시아가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1986년)를 숨긴 이유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았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 때문이었다. 핵이 초래할 부작용은 인간의 제어 수준을 넘었다고 본다. 이 세상에 평화로운 핵이란 없다. 일본의 후쿠시마(福島) 원전 폭발도 이를 여실히 보여줬다.”

진실을 말하는 데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다. 체제 비판적인 알렉시예비치 역시 그동안 갖은 탄압과 협박에 시달렸다.

“고향을 11년이나 떠나 있어야 했다. 2011년 드디어 귀국했을 때 루카셴코 정부는 나에 대해 언론 통제를 했다. 벨라루스에서는 내 책이 한 권도 출간되지 않았다. 지금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나는 선생님이었던 부모님으로부터 자기 일을 성실히 하도록 교육받았다. 또, 작가로서의 책임의식도 가지고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차기작으로 2개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나이 듦’, 다른 하나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전쟁과 핵 등 인류를 위협하는 거대한 재난을 소재로 했던 그동안의 경향과는 조금 다른 쪽이다.

“40년 가까이 글을 쓰면서 견지했던 것은 위대한 이념 속에서 발견한 ‘작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 자체, 인간의 행복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벨상을 받을 때 스웨덴 왕실의 여왕이 앞으로 뭘 쓸 건지 물었다. 나는 ‘사랑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이제 아픔 없는 글을 쓰겠군요’라고 했는데, 사랑이 아프지 않은 것인가 반문하고 싶다.”

알렉시예비치는 문학포럼 행사와 서울대(22일), 서강대(24일) 강연에 참석한 후 24일 귀국한다. 그는 “이탈리아에 살 때 바다와 사랑에 빠져 모으기 시작한 조개껍데기가 70개쯤 된다. 한국에서도 조개껍데기를 구해가고 싶다”며 “하나 있는 외손녀에게 줄 한국의 거리 사진집도 가져갈 생각이다. 사진을 보며 한국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