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일러스트 = 마음산책 제공

세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모든 가족 이야기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유난히 고통스러운 가족, 유난히 슬픔이 많은 가족, 반대로 넘치도록 살뜰하고 놀랍도록 다복한 가족도 있지만 대부분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나이 들고 늙어가며 지지고 볶고, 그 안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크고 작은 기쁨과 그만큼의 크고 작은 슬픔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결혼을 안 하기도 하고, 아이를 낳지 않기도 하지만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아들과 딸로, 가족에서 가족으로 이어진 긴 서사 안에 태어나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 이야기는 지루하면서도 스팩터클하고 힘들지만 때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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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기호 광주대 교수의 가족 소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는 그런 점에서 그의 가족 이야기면서 모든 가족의 이야기이다. 에피소드 중심의 짧은 이야기 40여 편이 묶인 책은 결혼 육 년 차, 다섯 살, 세 살, 두 아들을 둔 아내의 신경질이 부쩍 잦아진 어느 날 시작한다. 아내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올라가고 설거지 그릇 마찰음이 박력 넘치게 변하자 작가는 생각한다. 오래전 아내를 위로 한답시고 날린 공수표, “둘째가 세 살이 되면 대학원에 가서 공부해. 내가 일찍 퇴근하고 애들 다 볼게”라는 약속 때문이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은 강해지고 아내와 말다툼까지 벌인 날 그는 말하고야 만다. “당신 고생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너무 예민하잖아.”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가는데 아내는 뚝뚝 눈물을 흘린다. 그다음 아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두 달째 생리가 없어.” 이기호 가족 이야기는 아내의 신경질이 잦아진 어느 날이 아니라 막내 딸이 가족의 삶으로 들어온 것이 확인된 날부터 시작된다.

이어 소심하고 세심한 작가와 여덟 살 연하지만 언제나 남편보다 한 수 위인 통 큰 아내, 그리고 딱 그 나이 아이만큼 천진하고 그래서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두 아들과 막내딸이 벌이는 소소한 이야기, 소소해서 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한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큰아들. 처음엔 “나도 초등학교 들어갈 때 내 이름도 못 썼어”라고 기세등등하지만 아들과 함께 간 예비소집일 날, “팔에 오를 더하면 몇일까”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엄청 큰 수요”라고 답하는 아들을 보고는 “그래도 입학 전에 한글을 떼줘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마음 같은 건 많은 부모들이 공감할 이야기이다. 침대 아래에 깐 이불에 누워 잠든 부인과 세 아이 옆에 그 또한 누워 ‘누운 자리가 좁았고 그래서 우리는 더 가까웠다’고 말한 밤, 아내와 세 아이를 처가에 보낸 뒤 신난다고 외쳐보지만 맥주는 밍밍하고 “아빠 보고 싶지”라는 말에 “아니, 난 신나”라는 아들 대답을 듣고 갑자기 외로워진 마음, 아들의 첫사랑, 때로는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아이들 모습에 눈물이 핑 돈 사연까지 가득하다.

40여 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아름답다. 강연료로 아이들 옷 열한 벌을 사서 돌아오는 아빠 이기호는 가족을 사랑하고, 부인은 막내딸을 출산하러 병원에 가면서도 남편에게 신경 쓰지 말고 소설 마감 먼저하고 오라고 하며, ‘또 대출을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때엔 푼푼이 모은 통장을 내놓을 정도로 큰 나무같이 든든하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엄마 아빠가 피곤하다며 어깨 두드려 주는 감동도 안긴다. 양쪽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와 손자 손녀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읽다 보면 어떻게 모두 이렇게 부딪힘 없이 항상 이해할 수 있지?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든다.

그런데 여기서 떠올려야 할 것들이 있다. 이기호는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소설 지형에선 나오기 쉽지 않은 위트와 유머, 반짝이는 기지의 작가라는 점이다. 그가 들려주는 가족 이야기도 당연히 적정 수준의 유쾌함을 유지한다. 현실이 완벽하게 행복해서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쉽지 않은 삶의 국면까지도 유쾌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책이 ‘가족 소설’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는 서문에서 “쓴 이야기보다 쓰지 못한 일들이 더 많아 가족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고, “소설은 때론 삭제되고 지워진 문장들을 종이 밖으로 밀어내며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소설이니 모두 픽션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같은 삶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런 생각으로 책에 묶인 이야기들을 다시 보면 한 편 한 편이 모두 선하고 유쾌한 것은 이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고 따뜻하게 감싸 안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자기 삶의 이야기는 자신이 만들고 그 이야기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책은 작가가 2011년부터 4년 가까이 한 월간지에 ‘유쾌한 기호씨네’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묶은 것이다. 원래 작가는 월간 샘터에 1975년부터 35년간 자전적 가족 이야기를 연재한 소설가 최인호처럼, 삼십 년을 연재하겠다고 시작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2014년 4월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많은 아비와 어미가 자식을 잃고 슬퍼하고 있을 때 차마 내 새끼들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옮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끝낸 연재를 매만져 이번에 소설로 묶으면서 작가는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기쁜 일은 더 기뻐지고 슬픈 일은 더 슬퍼지는 일이 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지금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그들의 부모에게, 그리고 슬픔에 빠져 있는 부모들과 아이들에게도 언제나 포스가 함께하길.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이 줄줄이 붙어 있는 5월, 모든 가정에 기쁨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