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조각일까 그림일까’. 김재일 작가가 수면 위 동심원을 표현한 작품 ‘흔적’ 앞에서 제작 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양적 추상’ 김재일 전시회
“작품 만들며 자기 자신 비워”

“조각이 표현할 수 있는 3차원적 구조와 회화가 표현하는 2차원적 구조를 한 화면에 담아내고 싶다. 이것은 놓치기 싫은 나의 흔적을 작품 속에 각인시키기 위한 나만의 언어다.” (작가노트)

김재일 작가의 작품에서 받는 첫인상은 차가운 금속성이다. ‘캔버스’라는 2차원의 공간 내부로 크고 작은 원 모양의 3차원 음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태는 컴퓨터 그래픽 작업에 의한 기하학적 구조물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작품 앞에 한참 서 있으면 어떤 역동적이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시원에서 발원한 에너지가 서서히 오감을 감싸온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동양철학의 ‘음양’ 원리에 기반을 둬 수면 위의 동심원이나 지구의 내부 또는 은하계의 별 등을 표현한 것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유진갤러리(대표 정유진·02-3443-1396)에서 김 작가의 ‘흔적’ 연작 2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가 27일부터 5월 31일까지 열린다.

김 작가는 유니크한 ‘동양적 추상의 작품’으로 인해 한국보다도 해외에 더 많이 알려진 작가다. 도쿄 등 해외 아트페어에서 꾸준히 호응을 얻고 있으며 2016년 영국 런던의 사치갤러리에서 열렸던 아트페어 ‘START’에서는 작품이 도록의 표지를 장식했다. 또 내년에는 뉴욕의 선다람 타골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린다.

그의 작품은 해외 평론가들에게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국내 유명 단색화가들의 작품에 많이 비교된다. 그는 작품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우선 흙으로 캐스팅(주조작업)을 하고, 폴리에스터 레진을 붓고 유리 섬유로 보강을 한 후 반짝이는 아크릴 물감으로 흙을 파낸 구멍을 칠한다.

수행 과정을 연상시키는 작업과 이를 통해 태어난 비구상적인 형상과 화면 위 여백에 대해 뉴욕의 독립큐레이터 이오나 휘터커는 “김재일의 작업은 박서보, 정상화 등이 추구했던 ‘예술 작품을 만들며 동시에 자신을 비우는’ 자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평했다. 단색화처럼 명상의 세계로 이끄는 김 작가의 독특한 화풍에 대한 설명이다.

이 같은 작업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김 작가는 이탈리아 조각가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구성과 미국의 여성작가 본테쿠 리의 독특한 부조, 또 회화 작가 프랭크 스텔라의 조각 등을 많이 연구했다고 한다.

홍익대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한 김 작가는 애초에 고깃덩어리와 피, 체모, 가죽 등을 조형물화해 빛과 함께 전시하는 설치작업을 했었다. 평면을 활용해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드는 최근의 ‘흔적’ 연작은 2009년부터 시작했다. 이와 관련, 김 작가는 형상은 달라졌지만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같다고 말한다.

“고깃덩어리 등 인체 일부를 날것인 것처럼 조형물화해 보여주며 사회적 위계에 대한 사람 간 차별에 반대했다면 최근의 ‘흔적’ 연작 역시 사회적으로 공유된 기억만 중요시되고 개인의 추억은 무시되는 현실에 대해 자연이 내게 남긴 흔적을 강력히 형상화해 개인적 추억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글·사진 =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