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일본 에도시대의 우키요에. 소나무가 무성한데 에도시대에 소나무를 심은 것은 단순한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상식량과 치료 약의 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글항아리 제공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조홍민 옮김 ／ 글항아리

군웅할거의 혼란한 센코쿠(戰國)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일본 통일을 이끌어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들 세 인물을 비교할 때 흔히 두견새 비유가 인용된다. 누군가 보낸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 세 사람이 각각 어떻게 답할까. 오다는 ‘울지 않는 새는 죽여라’, 도요토미는 ‘울도록 만들어라’, 도쿠가와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한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오다, 전략가 도요토미, 인내의 화신인 도쿠가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일본의 잡초생태학자가 쓴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은 이들 셋이 의외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권력을 잡기 위해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며 때론 배신도 서슴지 않았던 이들이 모두 아름다운 꽃을 사랑했고, 작은 식물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 식물 마니아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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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아 오다는 이부키(伊吹)산에 약초원을 만들어 3000종에 달하는 서양 약초를 길렀고, 막대한 재력과 권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는 화려한 꽃을 사랑하며 임종 직전에 벚꽃을 보고싶어했다. 센코쿠 시대를 끝내고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를 근거지로 ‘에도시대(1603∼1867)’를 연 도쿠가와는 쇼군(將軍)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전용 약초원에서 약초를 키웠다. 물론 이들이 순수하게 꽃의 아름다움에 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권력을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식물학 지식을 동원하고 식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실용 식물학자이자 식물 전략가였다고 할 수 있다.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은 이들 세 식물 마니아를 중심으로 센코쿠 시대 말엽부터 에도 시대에 걸친 일본의 300여 년 역사를 식물, 식물학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에도 역사의 ‘식물’편으로 역사를 식물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미국 환경운동가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The Botany of Desire)’을 생각나게도 한다. ‘욕망하는 식물’은 사람들이 쉽게 감자, 대마초, 사과, 튤립 같은 작물을 자신들을 위해 키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들 식물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도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에도, 인구 100만의 도시를 지탱한 것은 천하를 통일한 영웅도, 쇼군도, 무사도 아닌 식물이었다고 말한다.

도쿠가와가 에도에 자리 잡은 이유부터 그렇다. 천하 통일을 꿈꾸는 무장이라면 누구든 당시 천황이 머물던 수도 교토(京都) 입성을 원했겠지만 그는 에도에서 막부를 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아직 힘이 남아 있던 가마쿠라(鎌倉) 막부로부터 지키기 위해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고, 수로를 통한 운송이 용이한 교통 요충지라는 점도 에도를 선택한 까닭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쌀이었다. 당시 권력의 힘은 고쿠다카(石高·장원 영주가 농민에게 부과한 조세)에 의해 좌우됐다. 결국 농지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말이다. 도쿠가와는 에도에 넓게 퍼져 있는 습지를 개척지로 개발할 가능성을 간파했고, 에도 만으로 향하던 도네(利根)강의 흐름을 돌려 결국 강이 흐르던 습지대를 광대한 곡창지대 농경지로 탈바꿈시켰다.

이미지 크게보기 식물을 사랑했던 무사들의 식물 문양 가문 문장들.

숱한 전쟁 속에서 무장의 성을 지킨 것도 알고 보면 소나무, 토란, 매화 같은 식물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시 성에서 가장 많이 심은 나무는 소나무인데, 이는 소나무의 상징성 때문이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성안 사람들은 그 안에서 오랫동안 버티기 위해 비상식량을 준비해둬야 했는데 소나무가 바로 비상식량원 중 하나였다. 소나무의 송진을 가루로 만들어 쌀과 섞어 만든 것이 송기떡이다. 또 소나무 지방분은 연료가 되고, 부상한 병사들의 지혈제로도 쓰였다.

오다의 계승자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쌓은 구마모토(熊本) 성도 ‘식물의 힘’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다. 이 성은 1877년 1만4000명의 사쓰마(薩摩) 군이 근대화된 무기로 포격을 퍼붓지만 50일간 공격을 견뎌낸다. 이는 가토가 성을 쌓을 때 다다미의 심으로 짚 대신 토란 줄기를 사용했고, 벽에는 박으로 만든 박고지를 발라 넣었기 때문이다. 해자에는 연근을 키웠다. 도처에 구황식물이 숨겨진 먹을 수 있는 성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식물들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한편 무사들의 꽃, 특히 매화와 벚꽃에 대한 사랑, 분재와 정원 가꾸기도 당시 권력의 향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사들의 운명과 뒤섞여 이뤄졌다. 센코쿠 시대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꽃은 매화였다. 하지만 벚꽃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다 어느샌가 무사들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벚꽃에 자신의 운명을 감상적으로 이입하기 시작했다. 곧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라는 노래가 생겼고 벚꽃처럼 깨끗하게 지는 것이 무사의 정신, 일본 민족의 고유한 정신으로 여겨지게 됐다.

또 에도 중기를 넘어가면서 무사들이 분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식물에 대한 관심은 원예 붐으로 이어져 정원 만들기가 유행처럼 번져갔다고 한다. 도쿠가와부터 에도의 쇼군들, 즉 권력자가 꽃을 사랑했기에 자연스럽게 원예가 무사의 교양이 되기도 했지만 연일 계속되는 싸움 속에서 꽃과 식물이 무사들에게 힐링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장과 무사들이 섬세한 눈길로 식물을 들여다보며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도는 식물 도시였고, 식물은 에도시대를 버티는 중요한 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칼과 꽃, 폭력과 아름다움, 나라 안으로는 권력투쟁이 계속되고 밖으로는 대륙 정복을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시대와 이를 지탱한 심미적 식물성의 이율배반. 이는 역사와 시대, 인물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부딪히는 요소들로 이뤄져 있는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얼굴이 나온다는 것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하지만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규모 벚꽃놀이를 열었다는 대목들을 보면 이들의 꽃놀이를 섬세한 식물성으로만 읽을 순 없다. 칼을 위한 꽃이었으니. 우리에게 이 시대 일본은 꽃보다 칼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