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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논설위원

1996년 9월 한승수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말레이시아 방문 길에 완공을 앞둔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찾았다. 지상 88층, 452m 높이의 이 건물은 미국 시카고 시어스타워(현 윌리스타워·443m)를 제치고 막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등극하려던 참이었다. 한쪽은 한국의 삼성·극동 컨소시엄이, 다른 쪽은 수풍댐을 지었던 일본의 가즈마사가 시공을 맡아 한·일전 성격도 띠었다. 브리핑을 받은 한 부총리는 엘리베이터를 마다하고 계단 쪽으로 향하더니 내처 꼭대기까지 올랐다. 걸린 시간은 30분. 그는 직전 마하티르 총리와 만나 “한국 업체가 일본 쪽보다 49일 늦게 시작해 10일 먼저 끝냈다”며 극찬하는 얘기를 들었던 터다. 엉겁결에 따라붙은 김진표 비서실장은 기진맥진한 반면, 관악산을 넘어 출근하던 60세 한 부총리는 멀쩡했다.

한 부총리는 의도치 않게 세계 최고 빌딩을 처음 걸어서 오른 진기록을 얻었지만, 계단 오르기는 엄연한 스포츠 경기다. ‘수직 마라톤’이다. 국내에선 1990년 서울 삼성동 무역회관에서 52층 1197개 계단을 오르는 경기가 처음 열렸다. 1995년 시작한 여의도 63빌딩(249m) 1251개 계단 오르기 대회의 최고 기록은 7분15초다.

올해엔 훨씬 강력한 경기장이 나타났다. 21일 기자들에게 공개한 잠실 롯데월드타워는 555m, 123층이다. 이곳에서 4월 23일 열리는 수직 마라톤 대회 ‘스카이런(SKY RUN)’ 참가자 신청은 접수 첫날 마감됐다. 1000명 선수가 경쟁·비경쟁 부문으로 나눠 2917개 계단을 오른다. 스카이런은 국제 공인대회다. 국제 수직 마라톤 대회를 주관하는 VWC(Vertical World Circuit)는 매년 두바이·런던·파리·뉴욕·상하이 등 10개 도시에서 공식대회를 여는데 여기에 서울의 롯데월드타워를 추가했다. 이들 도시 건물 가운데 최고·최장 경기장이다.

계단은 시대를 읽는 코드이기도 하다. 건축학자 임석재는 바벨탑과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고대 계단을 ‘하늘을 향한 수직 욕망이 내재된 것’으로 읽었다. 신과 가장 가까운 곳, 곧 가장 높은 곳은 정치권력을 상징했다. 권력 최정상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은 현대에 선거로 되살아났다. 정치판 수직 마라톤에는 배신과 사기, 오만와 증오가 넘쳐난다. 그런 험로를 1위로 돌파했다고 끝이 아니다. 최소한 한국에선 내려가는 일이 훨씬 난코스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