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돌려 만든 힘으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플레이 펌프도 아이디어는 멋졌지만 효율성은 없었다. 선의가 효율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부키 제공

냉정한 이타주의자 / 윌리엄 맥어스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부제에 꽤 절실하게 끌린다. ‘세상을 바꾸는 건 열정이 아닌 냉정이다’는 부제 말이다. 끌림의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을 구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이라면 끓어 넘치는 곳이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끄는 열정적이다 못해 격정적인 말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그 열정이 어떻게 실행되고 실천됐는지, 실행됐다면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제대로 따지지 않는 한국 사회이기에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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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른 살의 젊은 영국 철학자 윌리엄 맥어스킬 옥스퍼드대 철학과 부교수로 비영리단체 ‘기빙왓위캔(Giving What We Can)’, ‘8만 시간(80,000 Hours)’을 만든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이 기부·자선·원조 같은 분야에선 이상할 정도로 선의와 대의라는 말에 휘둘린다며 선행이야말로 효과와 결과를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고 주장해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가 내걸어 유명해진 구호가 바로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원하는 공리주의지만, 이를 위해 효율성 판단을 주장하는 냉정한 공리주의자이다.

그가 효율적 이타주의를 각종 국제적 기부, 원조 사례를 통해 세심하게 분석하고 조언한 책은 지난해 영미권에 출간돼 호평을 받았지만 (참고로 아마존 독자 평점에서 독자의 80% 가까이가 5점 만점에 5점을 줬다) 우리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 멀고 또 가까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관심이 높아지곤 있지만 아직은 전 지구적 차원의 기부나 국제 원조 문제가 우리 삶에 가깝게 닿지 않기에 책이 전하는 각종 아프리카 및 개도국 지원 활동이나 프로그램 이야기가 좀 멀게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젠 앞뒤 안 잰 열정보다 냉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보자면 ‘사고의 프레임 전환’을 위해 가깝게 두고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아프리카 출신 프레버 필드가 추진한 플레이 펌프는 저자가 꼬집은 좋은 열정이 나쁜 결과를 낳은 예이다. 플레이 펌프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빙글빙글 돌리며 노는 회전 놀이 기구에 펌프 기능을 결합해 아이들이 돌릴 때 나오는 회전력으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제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기만 하면 여인들이 수킬로미터를 걸어가 힘들게 펌프질할 필요가 없게 됐다. 멋진 아이디어에 세계는 열광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로라 부시 전 영부인, 유명 래퍼 제이지까지 나서면서 사상 최대 규모의 지원금을 따냈다. 아프리카 곳곳에 플레이 펌프가 설치됐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어떤 한 마을에 필요한 물을 끌어올리려면 하루 24시간을 돌려도 모자랐다. 놀이 기구는 아이들에게 노동이 됐고, 결국 아이들이 아니라 여성들이 대신 돌려야 했다.

우리 소비자에게도 익숙한 공정 무역, 윤리적 소비에 대해서도 ‘냉정하라’는 주장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냉정’의 핵심은 “공정 무역, 윤리적 소비가 생각보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 사정은 이렇다. 개발도상국 어린이나 노동자를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은 선진국 소비자들이 자주 벌이는 운동이지만 이는 오히려 가난한 나라의 빈곤층의 삶을 더 궁핍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국적 하청 공장은 현지 하청 업체에 비해 임금을 포함해 상대적으로 조건이 더 낫다. 유니세프 조사 결과 해고당한 미성년 의류 노동자들은 대부분 길거리 사기단이나 성매매 등으로 내몰렸다. 노동자들이 처한 가혹한 노동 환경은 공분을 살 만하지만 그렇다고 노동 착취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 대신 국내 생산 제품을 구입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소비자들이 일반 커피보다 비싼 공정 무역 커피를 마시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지만 객관적 자료는 실망스럽다고 했다. 공정 무역 제품이라는 이유로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돈 중 실제로 농부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이런 윤리적 소비는 오히려 ‘도덕적 허가(Moral Licensing)’, 즉 착한 일을 하고 있으니 선행을 덜 해도 된다는 도덕적 무감각함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했다. 물론 저자가 윤리적 소비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저자의 주장은 어떤 활동이든 허투루 돈이 새나가는 부분이 없게 하자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냉정한 당신이 세상을 바꾼다.” 그 사람이 말하는 선의나 열정만 믿고 냉정함을 잃어서는 안 되고 착한 일을 할 때도 증거와 신중한 추론을 통해 해답을 찾아가는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타적 행위가 최대 다수에게 최대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지 판단하려면 착한 일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가장 효율적인 선행이 무엇인지 꼼꼼히 따지고 그것부터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저자는 우리의 선행이 열정적 선의에만 의존할 때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그러니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냉정한 판단이 앞설 때 비로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냉정과 열정 사이. 선의는 이 사이에 있다. 단순한 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과 열정은 멀리 떨어진 반대말이 아니라 서로 손을 꽉 잡아야 한다는 가까운 사이라는 말이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