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이지빈 씨가 2월 2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연습실에서 공연팀과 함께 공연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제공

나사렛대 수화통역과 이지빈 씨

훤칠한 외모의 이지빈(23) 씨.

충남 천안 나사렛대 수화통역과에 재학 중인 이 씨는 요즘 뜻하지 않게 공연배우가 돼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공연 준비를 하고 있다. 배우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던 이 씨가 배우가 된 이유는 뭘까.

이 씨는 겉으로 보면 여느 사람들과 다른 게 없는 건장한 청년이지만,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농인(聾人)’이다. 그래서 수화통역과에 진학했고, 향후 진로도 ‘청각장애인 통역사’로 일찌감치 정했다.

그런 이 씨가 공연 배우가 된 것은 순전히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위해서였다. 이 씨는 얼마 전 장애 어린이들을 위해 수화(手話)로 공연하는 팀에 수화통역을 해 주는 봉사활동을 하기로 하고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공연팀 연습실을 찾았다. 그의 남다른 외모를 본 감독이 직접 공연해 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고, 바로 배우로 발탁이 됐다.

“요즘은 공연 준비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치고받고 놀래’라는 창작극인데, 물을 둘러싼 한 부족의 이야기예요. 연습하는 모습이 조금 독특하죠? 농인과 청인(들을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하는 공연이거든요.” 이 씨는 환하게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그가 이처럼 장애 어린이를 위한 봉사활동에 나서게 된 이유는 장애를 앓고 있는 본인 자신이 어린 시절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제 청각 장애는 선천적인 것은 아니고 두 살 때 앓은 뇌수막염 때문이에요. 어릴 땐 불편한 점도 많았고, 차별 때문에 상처받은 적도 있었어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른이 돼서도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좀 더 각별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린이는 좋은 추억을 만들며 자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본인 스스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컸는데, 사람들이 이 씨와 얘기를 하다가 의사소통이 잘 안 되면 짜증을 내는 표정을 짓거나 무시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 특히 어린이들은 이런 상대방의 태도에 큰 충격을 받고 심한 차별로 인식한다고 한다.

“학창시절, 특수학교에 다녀 청인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들의 문화를 잘 몰라요. 대학에 들어와 청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농인과 청인의 문화 차이가 크다 보니 갈등도 생기고 문제가 많았어요. 지금은 서로 이해하고 노력하며 적응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 씨의 고충이 대학생이 돼서도 계속된 것이다.

대학생이라 많은 돈은 못 내지만, 용돈에서 떼어내 기부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후원을 하면서 좋은 감정을 많이 느껴요. 큰 금액도 아니고, 오랜 기간 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돕는다는 사실이 뿌듯해요. 제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스스로에 대해 만족감 같은 것도 갖고요.”

수화통역과 같은 봉사활동에 20여 차례 이상 참가하면서 많은 경험도 쌓았다. 이 씨는 지난해 인천농아인협회 체육대회에 수화통역을 위해 참가했다가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살이 까맣게 탔던 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사람마다 시력이 다른 것처럼 청각 장애도 들리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거든요. 차이가 차별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청각장애인 통역사가 돼 청각장애인들이 차별 없이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어쩌면 어린이를 돕는 것도 같은 맥락 같아요. 주어진 상황의 차이, 특히 경제적인 차이 때문에 어린이들이 차별받고 기회의 평등을 박탈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사람의 작은 도움이 한데 모이면 어린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공연장으로 되돌아가며 이 씨가 남긴 말이다.

임대환 기자 hwan9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