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영화 ‘겨울 나그네’의 촬영지인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캠퍼스. 윤동주 시비(왼쪽)와 대학원 건물인 스팀슨관(오른쪽) 사이로 나 있는 완만한 언덕길에서 주인공 민우(강석우)와 다혜(이미숙)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촬영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이미지 크게보기 민우가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다가 언덕을 올라가던 다혜와 부딪히는 영화 속 장면.

68 영화 ‘겨울 나그네’ 촬영지 연세대

한국의 명문으로 분류되는 연세대 캠퍼스는 종(縱)의 미가 돋보이는 공간이다. 흔히 이 부분은 또 다른 대학의 명가로 불리는 고려대 캠퍼스가 횡(橫)으로 구성돼 있는 것과 비교되곤 한다. 엉뚱한 얘기로 빠지는 듯하지만 1980년대 초반, 그러니까 대학 교정에 경찰 특수부대인 이른바 ‘백골단’이 드나들었던 시절, 양교의 시위는 게릴라전과 로마 군단의 싸움으로 비교되곤 했다. 연세대는 적을 안으로 깊이 끌어들이는 쪽으로, 고려대는 양 병력이 길게 병렬 배치된 후 결국 한판 싸움으로 결정 나는 쪽이라 해서 그렇게 불렸다. 그만큼 연세대 캠퍼스는 수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계곡이 깊으면 깊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어쩌면 대학 캠퍼스도 그렇다. 연세대교정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 중심의 신작로라고 할 수 있는 백양로를 걷고 있으면 눈부신 청춘의 시기쯤에는 이 학교를 다니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약간의 질투심을 갖게 만든다. 고 곽지균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이자 현대 한국영화의 전설로 손꼽히는 ‘겨울 나그네’(1986년)를 찍으면서 캠퍼스를 한참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고 최인호 작가의 동명 원작소설에서 나오는 공간 그대로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것이 최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최 작가가 다녔다는 문과대학(그는 영문과를 나왔다)을 중심으로 교육과학관과 대학원 건물인 스팀슨관 사이로 나 있는 오붓한 길은 윤동주 시비(詩碑)가 들어 있는 핀슨관으로 이어진다. 완만한 경사가 짧은 커브 길로 연결돼 있는 이 길은 연세대 안에서 가장 분위기가 좋은 코스로 정평이 나 있다. 바로 이곳에서 영화 ‘겨울 나그네’의 주인공 민우(강석우)와 다혜(이미숙)가 처음 만나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을 촬영했다. 어쩌면 꽤나 진부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둘이 만나는 모습은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지금도 핀슨관 길은 ‘겨울 나그네’를 떠올리게 한다.

◇시대의 눈물이 담긴 러브스토리=‘겨울 나그네’는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초상, 그 여린 정서를 그려낸 멜로 드라마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대의 상처가 너무 깊게 배어 있다. 그 칼자국이 너무 지독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통증을 잊지 못하고 산다. 이 영화는 지독한 러브스토리인 척, 사실은 시대의 배반에 고통스러워 하는 젊은이들의 비극적이면서도 비루(悲淚)해지는 운명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사회정치극을 만들어 내기 힘들었던 전두환 군부독재 시대를 비극적인 사랑 얘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관객들, 특히 젊은 층이 이 영화에 열광했던 것은 그 같은 이중적 의미를 읽어 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모든 것이 행간(行間)의 시대였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다시 보면, 이 영화는 꽤 정치적이고 역사적으로 읽힌다. 아니 그렇게 읽힐 소지가 충분하다.

민우의 삶이 뜻하지 않게 자꾸 비켜 나가고 왜곡되는 것 자체가 그렇다. 민우는 사생아다. 대학에서 의대를 다니는 수재지만 기지촌 여성에게서 태어나 생부 손에 자랐다. 그걸 그는 아버지가 죽을 때쯤 안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을 때 아버지는 무기력한 상황에 빠져 있다. 재산도 잃고 건강도 잃었다. 그를 돌봐줄 수 있는 부권(父權)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후 민우는 뜻하지 않게 자꾸 폭력 사건에 휘말리는데 채권자를 폭행해 감옥에 가는가 하면 결국 기지촌과 연결된 마약 사업에까지 얽히게 된다. 그건 민우의 선배로 히피처럼 살아가는 현태(안성기)도 마찬가지다. 민우 때문에 그는 어느 날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남자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한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태는 이후 차분한 생활로 돌아온다. 학교도 온전히 졸업하고 대기업에도 취직해 안락한 중산층 가장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두 사람의 운명은 처음과 끝이 서로 다른데, 그건 흔히들 얘기하는 ‘386세대’가 숱하게 겪었던 ‘관계의 역전(逆轉)’처럼 보인다. 당시에 운동을 했던 사람 중에 현실과 타협한 사람이 많다.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시대의 격랑에 휘말리기도 했다. 사람의 운명은 늘 그렇게 엇갈린다.

그 모든 일은 이 영화에서 다혜와 함께 민우를 사랑하게 되는 기지촌의 제니(이혜영)와 같은 여자 얘기, 혹은 그 여자들과 맺게 되는 사랑의 관계를 빼고 들여다보면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1980년대는 ‘아버지=국가=체제’에 대한 부정을 요구받았던 시대다. 그렇게 이념적으로 아버지와 등진 채 모두 ‘사생아’처럼 살았으며 얄궂은 운명의 기로에 섰다. 뼛속 깊이 자유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지만 종국에 가서는 허물어지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있었던가.

최 작가가 이 소설을 쓴 것은 그가 절대적 감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나이브(naive)한 정서의 언덕을 넘어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생긴 울혈(鬱血)을 맑은 수액으로 빼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제니가 아이를 배고, 또 낳는 것은 최 작가와 곽 감독 공히 새로운 시대에 대한 잉태를 꿈꿨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랑이 거절당하던 시대였다. ‘겨울 나그네’는 그 시절의 아픔을 얘기하는 작품이다. 그러니 이 소설과 영화를 꼭 사랑 얘기만으로 기억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민우의 눈물이 꼭 다혜와의 사랑 때문만이었을까. 영화는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로 동시에 봐야 하는 법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민우가 찾아가는 연세대 남문 근처 다혜의 집 터. 영화 촬영 당시 3층 양옥이었지만 지금은 카페(파란 문)가 들어 있는 원룸 건물로 바뀌었다.

◇젊은 날의 초상을 찾는다는 것=사람들이 이 영화를 풋풋함, 청초함 등의 대명사로 기억하는 이유는 순전히 교정(校庭) 탓이다. 첼로 가방을 들고 가던 다혜는 질주하듯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민우와 위험천만하게 부딪힐 뻔한다. 다혜의 악보가 날리고 민우는 자전거와 함께 나뒹군다. 당황한 두 사람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다. 다혜가 돌아선 후에야 민우는 겨울의 죽은 잔디밭 사이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학생증을 줍는다.

둘의 이 1980년대식 치기 어린 만남이 이뤄진 곳이 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대를 다니던 민우와 음대를 다니던 다혜가 부딪힌 곳이 윤동주 시비에서 문과대학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니. 둘 다 교양과목을 들었을 때였을까. 이건 순전히 최 작가의 개인적 소회(所懷) 탓에 이뤄진 설정일 것이다. 영화는 종종 ‘영화적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한다. 의대생 민우와 음대생 다혜가 그곳에서 부딪히는 것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 어떤 연인이라도 이곳 언덕길에서 조우해도 될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라면 여기에 한 번쯤 가야 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연세대는 최 작가의 청춘의 빛났던 곳이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연세대 주변으로 맞춰졌던 것은 그 때문이다. 민우가 찾아가는 다혜의 집(사실은 민우 대신 현태가 더 그녀의 집 앞에 찾아가 이런저런 말을 전하고 나중에는 가볍게 키스까지 하게 된다. 결국 결혼을 하게 되는 건 두 사람이다)이 연세대 근처에 위치한 한 주택이었던 것도 그런 연고였을 것이다. 건축가 김중업이 1961년에 설계한 이 집은 영화 촬영 당시에는 3층짜리 하얀색 양옥집이었다. 그 집을 찾아가려면 연세대 남문 쪽으로 나와야 된다. 거기엔 담장이 이어져 있는데 그 담 안쪽에는 현재 연세ROTC 건물과 연세재활학교가 있다. 담장을 10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끼고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영화 속 다혜의 집터가 나온다. 지금은 ‘아름다운 구멍가게’라는 반지하 카페가 들어 있는 원룸 건물로 변해 있는 곳이다. 다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중년 남자가 연세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젊은 시절의 초상을 찾아다니는 것은 기이하게도 온당치 못한 일처럼 느껴진다. 불온(不穩)하게까지 보인다. 과거가 아름다운 것은 선택적인 기억 탓이다. 과거보다는 현실이 더 따뜻해야 한다. 앞날이 더 지향적이어야 한다. ‘겨울 나그네’가 생각나는 건 어쩌면 지금과 미래가 불안한 탓일 수도 있다는 역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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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위한 사멸=아마도 초여름이 시작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곽 감독에겐 자꾸 옛날 생각이 났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자신이 그려낸 인물 민우를 생각했을 것이다. 영화의 결론은 그게 맞았다고 자꾸 되새겼을 것이다. ‘민우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곽 감독은 생각했다. 하긴 그가 살아서 다혜를 다시 만나거나 아니면 제니와 힘을 합쳐 열심히 살아가거나 했다면 이상한 영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 그러니까 영화 속 시대였던 1986년은 죽은 시절이었으니까. 새로운 미래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니까.

어쩌면 곽 감독이 영화 속에서 민우를 죽게 한 건 사멸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2010년 5월 대전의 한 아파트에 홀로 앉아 곽 감독 역시 민우처럼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라면 자신도 이제는 끝을 향해 가야 한다고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노트북으로 유서를 썼다. 짤막하게 한 줄, 일이 없어 힘들다고 썼다. 그리고 연탄을 피웠다. 사위(四圍)가 조용했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외로웠지만 왠지 필연적이라는 느낌을 가졌을까. 곽 감독은 그렇게 갔다. 마치 자신의 영화처럼. 그리고 민우처럼.

벌써 31년이 지났지만 곽 감독의 ‘겨울 나그네’를 다시 보는 건 그리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우리들의 기억은 몇몇 명화(名畵) 속에 갇혀 있을 때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이 영화는 오랜 기간 우리를 잘 놓아주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1986년에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방황하고 있었던가. 현태와 다혜 부부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민우의 아이를 그대로 맡아서 키우고 있을까. 미국 남자를 따라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떠난 기지촌 여자 제니는 자신의 자식을 찾으러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까.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아이마저 여기를 떠난다면 남아 있는 것이 너무 없으니까. 현태와 다혜의 삶에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모두 다 사라져 버리니까.

한겨울의 대학 교정은 자꾸 연애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을 하고 싶어진다. 혁명도 연애처럼 해야 하는 게 맞는다. 민우와 현태, 다혜와 제니처럼. 최인호와 곽지균의 사랑 예찬도, 그걸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얘기도 바로 그 틀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문득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너무 빨리 떠났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지극히 아쉬운 일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