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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얼마 전 미수연(米壽宴·88세)을 치른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 국민의당 상임고문은 수첩이 없다. 전화번호, 약속 날짜, 메모 등은 모두 머릿속에 있고 절대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는다. 197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하면서 증거를 남겨 놓지 않기 위해 무조건 외워 버리는 습관이 몸에 밴 탓이다. 이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수차례 끌려가 고문당했지만 물증이 없어 들킨 적은 없다. 지금도 예전 일을 정확히 날짜까지 기억해 내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디지털 기기가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지금은 자신의 전화번호도 잊어버릴 정도로 전적으로 기기에 의존하고 있다.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일어나 티맵을 보고 운전하거나 카카오 택시를 불러 출근한다. 회사에서도 일거수일투족이 디지털 기록으로 남는다. 심지어 스마트폰만 가지고 다니면 내가 어디에 다녔는지가 다 나오고 하루 평균 한 사람이 CCTV에 찍히는 것이 150회라고 하니 비밀이 없다. 이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도 이런 ‘디지털 흔적’이 없었다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건의 스모킹건이 된 태플릿 PC도 최 씨가 거듭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대통령 연설문이 정호성 전 비서관으로부터 전달된 사실, IP 추적을 통해 최 씨와 PC가 독일, 제주도 등지로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증거 능력을 인정받았다. 최 씨도 이런 디지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23개의 대포폰(차명휴대전화)을 사용하면서 추적을 피했지만 지울 수는 없었다. 가방 속에 꼭꼭 숨겨 놓은 경찰청장 등 주요 인사 파일은 조카인 장시호 씨가 스마트폰으로 찍어 저장 디스크에 보관해 놓은 것이 뒤늦게 밝혀져 인사 농단의 결정적 증거가 됐다. 장 씨는 비서에게 보관을 지시하면서 “언젠가 이 파일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니 선견지명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 측에서 역전의 카드로 사용하려던, 김수현 전 고원기획 대표가 남긴 2300여 건의 녹취 파일도 평소 모든 것을 녹음해 놓은 김 씨 때문에 드러나게 됐다. 자동 녹음 앱을 설치해 뒀기 때문에 모든 대화가 다 기록된 것이다. 덕분에 국민은 이들의 국정 농단을 음성과 화면 등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요즘 디지털 기록을 삭제해주는 ‘디지털 장의사’가 인기라지만 진실을 모두 숨길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