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인간 본성의 역사 / 홍일립 지음 / 에피파니

책의 두께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양장본에 본문만 1058쪽에 달한다. 총 1596종의 참고 문헌이 103쪽에 걸쳐 수록돼 있다.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은 인간 본성의 관념을 통시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앞부분은 공자, 맹자, 순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동서양의 고대 사상가들이 인간 본성에 내재한 선악(善惡) 문제를 어떻게 봤느냐를 고찰한 내용이다. 마키아벨리와 데카르트, 홉스, 로크, 흄, 루소 등 서양 근대 초기와 계몽기를 이끈 철학자들의 견해가 뒤를 잇는다. 마르크스와 다윈, 프로이트, 파레토, 보아스, 스키너 등 근현대 자연·사회과학 선구자들의 생각도 소개한다.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처럼 현대의 각 이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생물학·신경과학 연구자들의 견해와 그 한계도 살핀다.

인간 본성을 연구한 인류 지성사를 두루 담은 이 책이 ‘국산(國産)’이라는 사실은 큰 감회를 준다. 이런 유의 저서가 대개 번역서였던 탓이다. 저자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탐구를 시작했다가 5년여의 시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편집진의 소개에 따르면, 저자의 지난 5년은 ‘칩거와 성찰, 공부’로만 이뤄져 있다.

이런 책을 집필한 공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자의 지적 편력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배웠으며, 대학원 등에서 사회사상과 정치경제학·미술사를 공부했고, 예술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조사연구소 연구원을 지냈으며, 2007∼2008년 같은 대학 사회학과 방문학자로 있었다.

저자는 과연 인간 본성에 대한 핵심 쟁점의 답을 얻었을까. ‘우리는 선한 천사인가, 타고난 악마인가?’ ‘본성은 타고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인간 본성 논쟁은 언어 문제인가?’ ‘인간 본성이라는 게 있기는 하나?’

책의 1050∼1055쪽에 있는 맺음말의 핵심은 ‘딜레마’이다. 인간 본성의 관념사에서 등장한 수많은 말(용어)들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유용했으나, 인간의 정신이 작용하는 전모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호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말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은, 인류사의 지난날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인간 본성에 관한 더 많은 말들을 쏟아낼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에 관해서 얼마나 더 새로운 사실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이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적어놓은 문장은, 인간 지식의 허무를 뜻하기보다 자연 앞에서의 겸허에 더 방점이 찍혀 있을 것이다. “일찍이 고대인 양주가 가르쳐 주었고 다윈이 긴 논증으로 풀이했듯이, 그리고 흄이 말로 거들었듯이,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것들에 대한 대부분의 답은 아마도 자연 속에 있을 것이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