憲法재판관들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이미지 크게보기

박정수 이화여대 교수 행정학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해 국민의 목소리를 결집, 이를 국가 운영에 반영하는 정치 시스템이 취약하다. 형식적으로는 모두 공화국이고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의 운영 방식은 독재 형식을 유지하거나 집권 세력을 반대하는 저항 세력에 의해 정부가 전복되는 경험을 되풀이하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체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독재나 무정부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중톈 국가를 말하다’에서 강조하듯이 진-한-수-당-송-원-명-청의 2000년이 넘는 중국의 제국 역사에서도 공화와 민주의 학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촛불의 시간’에서 말하는 시민민주주의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광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 왕조시대나 권위주의 시대에 주입식으로 학습돼 온 국가 무오류나 군주에 대한 무조건 복종 방식이 아니라, 민주주의 시대는 시민이 주인이고 시민의 선택에 따라 정부 운영자가 바뀌게 된다. 따라서 집권 세력의 부패나 무능력에 대해서는 시민이 저항 의사를 표출하게 되고, 이때 물리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하는 광장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때의 시민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에 기반한다. 촛불시위도 한몫 하고 있지만, 태극기 시위가 또 다른 한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어 충돌하는 광장의 역할만으로는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국회가 탄핵소추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재판 진행 중이다. 문제는 촛불은 촛불대로, 태극기는 태극기대로 광장의 목소리로 헌재(憲裁)의 탄핵 결정을 겁박하려는 작금의 사태다. 물론 박한철 전 헌재소장의 퇴임으로 전체 9인 중 8인만이 재판을 하고 있고, 3월 13일이면 이정미 헌재소장 직무대행마저 임기가 만료돼 이 기한이 지나면 7명으로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탄핵 결정 인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므로 탄핵 인용 확률이 급격하게 낮아질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위를 통해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는 헌법 가치를 부정하는 매우 위험한 행동으로, 우려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적대적 여야 관계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이번 사태가 정리된 뒤에도 ‘51 대 49’ 형식의 정치적 지형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때,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규범이 표현의 자유로 대변되는 광장의 역할과 아울러 헌법의 가치다. 둘 중 하나라도 본질적으로 훼손되는 경우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고 우리는 민주국가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더는 견지하기 어렵다. 공정하게 선출된 헌법재판관들을 믿고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나만 옳고, 내가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보다 적정한 절차를 통해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게 훨씬 더 의미 있는 역사가 될 것이다.

박근혜와 최순실로 상징되는 과거 닫힌 체제와의 결별, 사회 양극화와 청년실업 해소, 적대적 여야 관계 및 지역 패권 정치 재편,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지형의 균열, 대선과 개헌이라는 지난한 과제를 시민의 힘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시민의 힘이 하나의 목소리로 모아지는 형식 가운데 하나가 광장의 역할이라는 점도 맞다. 규제와 관치를 넘어 자유와 공동체를 함께 강조하는 새로운 헌법 가치의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화일보

문화일보

憲法재판관들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