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종호 논설위원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1960년에 발표된 최인훈(81)의 대표작 ‘광장(廣場)’ 초판본의 서문 일부다. 1961년 판 서문의 한 대목은 이렇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密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한국 현대문학의 고전(古典)인 걸작 소설 ‘광장’에는 밑줄 그어 기억할 만한 표현이 많다. ‘힘껏 산다. 시간의 한 점 한 점을 핏방울처럼 진하게 산다’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진리에 대한 해석을 혼자 차지하려는 사람들만 설치는 고장, 이런 사회에서 혁명의 흥분을 꾸미는 자는 위선자다’ ‘(남쪽은) 백귀야행(百鬼夜行)하는 난장판’ ‘(북쪽의)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은 없었다.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건네려고 가까이 가면, 깎아놓은 장승이었다’ 등.

문학평론가 김인호는 “시대와 역사를 꿰뚫어보는 눈, 이데올로기 비판, 그것을 뛰어넘는 미적 형식, 게다가 주인공 이명준과 은혜가 만들어낸 사랑의 아름다움” 등을 들어 “한국 문학사는 지금도 ‘광장’의 문제의식에서 멀리 나가고 있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성취와 분단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관통하는 근본적 내용이 선구적으로 담겨 있다”고 극찬했다.

그런 최인훈이 오는 24일 서울대 졸업식에서 명예졸업증서를 받는다. 1952년 법학과에 입학한 지 65년 만이다. 6·25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 1955년 휴학한 뒤 복학하지 않아 1957년 제적됐었다. “다른 학생들은 어려운 시간을 성실히 인내해 졸업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며 대학 측의 졸업식 축사 요청을 고사한 그는 “학업을 중단한 게 늘 아쉬웠는데 학교가 특별한 우정을 보여줘 고맙게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원로’를 자처하지만, 허명(虛名)과 독선에 집착해 시정잡배만도 못해 보이는 사람들이 사회를 더 혼란케도 하는 것이 현실이어서, 깊이·품격에 시공을 초월한 생명력까지 두루 갖춘 그의 문학 세계와 처신이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