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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바야흐로 혼돈의 시대다.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에 따른 탄핵 정국으로 행정부는 마비됐고 대기업 총수들이 잇달아 수사 대상에 올라 조사를 받고 있다. 계속되는 경기침체에 따른 고통만큼이나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불신도 높아져만 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른바 ‘포스트 박근혜 체제’에 대한 다양한 구상이 제시되고 있지만, 시민들을 충분히 납득시킬 만한 제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시대 이후에 대한 구상은 현 정부가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분명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지금의 혼란은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이 훼손됐기 때문에 발생했다. 법과 원칙의 수호자여야 할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오히려 법치를 훼손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권력을 남용한 결과, 국가는 정의를 세우고 시민들의 삶을 보호해야 하는 본연의 임무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행위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는 상황에도 국기 문란의 주역들이 헌법재판소의 출석요구를 가볍게 무시하거나 국가기밀을 운운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를 좀먹던 이 도덕적 파산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따라서 포스트 박근혜 체제의 구상 출발점은 이 무너진 공공성(公共性)의 회복, 즉 국가 리더십을 행사할 주체들이 헌법적 질서를 수호하고 공익의 대변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감독하는 규범과 제도에 관한 논의여야 한다.

한편, 정치권이 촛불집회로 분출된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새로운 사회를 위한 비전과 가치로 녹여내지 못하고 있는 점도 새로운 체제가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다양한 가치관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다원화된 사회로 변했다. 더 이상 성장이나 분배, 보수 아니면 진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요구를 국가가 일일이 충족시키는 것도 더는 가능하지가 않다. 포스트 박근혜 체제는 통치자가 국가 비전과 가치를 일방적으로 정하고 실행하기보다는 대의민주주의의 제도적 개선을 통해 시민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요구 사항을 수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결을 같이해 정치권에서는 1987년 민주화 당시 만들어진 현행 체제를 종식시키고 제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권력의 공백기에 분출되는 정치적 셈법에 따른 개헌(改憲) 논의들은 오히려 혼란을 더하고 있다. 개헌론자들은 국정농단에 대한 시민적 분노를 방패 삼아 제왕적 대통령제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계의 연구 결과들은 전반적으로 내각제나 대통령제 등 특정 제도가 정치적 성과를 결정하기보다는, 한 사회의 정치문화와 제도의 운영이 실질적으로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를 보장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포스트 박근혜 시대의 권력 분산은 국회가 수많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시민정치와 공존을 모색할 때 가능하다.

포스트 박근혜 체제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대외 환경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출범으로 예상되는 미·중 간 패권경쟁의 심화이다. 이 두 열강의 각축은 사드(THAAD) 배치처럼 사활을 걸고 선택해야 하는 이슈를 더 많이 양산할 것이다. 다른 하나의 변화는,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주도하는 글로벌 정보경제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경제는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관리되지 않는 복잡한 사회경제적 변동을 야기할 것이다. 포스트 박근혜 체제의 성패는 이 중대한 결절점(critical juncture)의 복합성을 이해하고 체계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데 달려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권 주자들의 개혁 방안은 아직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어젠다임은 분명하나, 재벌 규제가 자동적으로 정보경제에 부합하는 일자리의 창출로 이어지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가 시민의 의사를 잘 반영해 다양한 가치관과 복잡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성공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포스트 박근혜 시대를 앞두고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절박한 염원을 정치인들이 무겁게 받아들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