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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용 논설위원

며칠 전 한 지인이 SNS를 통해 이해인 수녀의 시 한 편을 보내왔다. 제목은 ‘새해에는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다. 읊조리다가 유독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이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정월의 보름달만큼만 환하고／둥근 마음 나날이 새로 지어먹으며／ 밝고 맑게 살아가는／“희망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직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찌든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구절이리라. 그런데 새해 벽두부터 우울한 칼럼을 쓰고 있으니 독자들에게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대한민국호가 ‘3각(角) 격랑’에 휩싸여 있다. 정치, 외교·안보, 경제 모두 뒤뚱댄다. 정치권부터 들여다보자. 개헌과 조기 대선, 유력 잠룡을 고리로 한 빅뱅이 곧 터질 기세다. 국민은 없고 정치공학만 있다. 표를 쫓는 좌 편향 경제 포퓰리즘도 화기(火氣)를 내뿜는다. 이합집산, 합종연횡으로 뒤엉킨 ‘배신·복수 막장극’은 개봉박두다. 통치자의 신뢰는 땅에 떨어져 ‘권력 공백’이다.

4강 외교에선 우리는 ‘외톨이’ 신세다. 수교 이래 최상이던 한·중 관계는 최하다. 미국에 밉보이면서까지 친중(親中)했건만 돌아오는 건 ‘비열한’ 앙갚음이다. 빌미는 우리의 사드 배치 결정이다.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로 급반전된 한·일 관계도 살얼음판이다. 러시아와는 데면데면한 사이다. 핵 완성을 코앞에 둔 북한과는 최악이다.

미국은 이제부터가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는 ‘불확실성 덩어리’다. ‘확실한 건 모든 게 불확실하다는 것뿐’이다. 오는 20일 그의 취임 일성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북핵, 보호무역주의 등 사활이 걸린 이슈에 직면한 우리도 초비상이다. 그는 겉은 ‘미치광이’, 속은 ‘냉혈한’이다. 철권(鐵拳) 외교로 내치의 약점을 상쇄하려는 교활함도 있다. 돈독한 혈맹 관계에 언제 금이 갈지 모른다. 올해는 미 경제학자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 출간 40주년이다. 그가 부활한다면 트럼프의 변칙 행각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경제는 ‘십면초가’다. 초(超)불확실성 속에 구조적 문제와 관료·정치권의 무능까지 겹쳐 백척간두 위에 서 있다. 과(過)부채, 청년실업, 양극화, 고령화, 신성장동력 상실 등 5대 난관은 난공불락의 벽이다. ‘저성장의 고착화’라는 불편한 진실도 정설로 굳어졌다.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계속 밑도니 더 큰 걱정이다. 미 금리인상은 ‘민생 곡성(哭聲)’의 시작을 알린다.

한국호는 이대로 침몰하는가. 그래선 절대 안 된다. 특히, 5000만 생명줄이 담보된 ‘경제 풍랑’과의 사투에선 필승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선장과 승객은 기본과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한 ‘4대 의무’를 제안한다. 우선, 지금이라도 정부는 노동 등 규제 개혁과 산업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해야 한다. 추경, 통화 완화 등과 같은 안이한 정책을 통한 어설픈 경기부양은 자제하라. 둘째, 신성장동력 창출을 위해 4차 산업혁명 대응에 진력해야 한다. 기업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 장벽도 걷어내라. 셋째, 기업의 기(氣)를 꺾지 말라. 기업이 팔팔해야 성장도 하고 일자리도 늘어난다. 끝으로, 선장인 정부는 계기(計器) 아닌 시계(視界) 운항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중심과 방향을 잡아야 한다.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답게 솔선수범하라.

문득 두 가지 장면이 머리를 스친다. 하나는 요즘 금융계에 떠도는 ‘10년 주기설’이다. 위기가 10년마다 터진다는 이 주장의 해당년은 1997년(외환위기)과 2008년(금융위기), 올해다. 또 하나는 우리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이 혹독할 때 왜적이 임진왜란 직후 우리를 두 번째 침략한 정유재란이다. 올해가 전란 발발 420년이 되는 해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정유년(丁酉年) 새해 키워드로 ‘치킨 런’(Chicken Run)을 제시했다. 영국의 한 양계장에 갇힌 암탉들의 탈출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제목이다. 그는 “어떻게든 날아서 탈주하려는 닭들처럼 한국 경제도 비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 상영됐던 이 영화를 어제 인터넷을 통해 다시 봤다. 주인공 ‘진저’의 명대사 한 토막이 유독 귀에 꽂힌다. “여길 빠져나갈 가능성은 100만 분의 1이야” 하고 외친 누군가에게 그가 던진 말. “그럼 가능성이 있긴 있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야.” 우리에게 과연 이 지독한 위기를 돌파하려는 ‘진저’식(式) 결기는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