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조해동 경제산업부 차장

“주력산업이라는 용어 자체를 폐기(廢棄)해야 합니다!”

얼마 전 국책연구원장 A와 대화하다가 깜짝 놀랐다. 부드러운 성품인 그의 입에서 폭탄 같은 얘기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기업구조조정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다. 그의 입에서 독설(毒舌)이 이어졌다.

“한국 경제를 그동안 먹여 살려온 주력산업이 앞으로도 한국 경제를 이끌어나가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지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경쟁력이 없는 산업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산업이 태어날 수 있고, 한국의 미래가 열립니다.”

지난 26일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가 열렸다. 청와대에서 열리는 서별관회의가 없어지고 만들어진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의 여덟 번째 회의다. 정부는 이날 회의가 끝난 뒤 “조선, 해운, 철강, 유화 등의 업종에 대해 산업 차원의 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해 철저한 자구 노력과 엄정한 고통 분담의 대원칙하에 구조조정을 일관되게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장에서 정부의 발표에 대한 울림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시장에서는 오히려 “향후 6개월 이내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큰데 정부가 무슨 대단한 구조조정을 하겠어?” 하는 말이 훨씬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는 ‘대권 잠룡(潛龍)’ 중에 구조조정을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전 국민에게 일정 금액을 ‘기본 소득’으로 나눠주겠다며 표(票) 달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있지만, 구조조정을 어떻게 하겠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구조조정이란 그만큼 고통스럽고, 인기 없는 일이다.

‘정치는 생물(生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게 정치인이지만, 정치인 중에서 기업이나 산업에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무것도 안 해도 기업은 영원할 것이라는 발상의 극단적인 예가 “삼성전자의 1년 치 영업이익(예컨대 25조∼30조 원)만 무상으로 저소득층에게 나눠주면 분배 구조를 일시에 개선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현재 구조조정 대상인 산업은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주춧돌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한국이 다르다면, 새로운 이치(理致)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현재 업종을 유지하려면 죽을 각오로 일하는 방식을 혁신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사멸(死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산업을 개척해야 한다.

흔히 구조조정을 얘기할 때 재무(財務) 구조조정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구조조정은 산업 구조조정이다. 그동안 한국을 이끌어온 주력 산업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면,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구조조정이다. 우리나라는 천연자원도 별로 없고, 영토도 크지 않다. 따라서 미래의 먹거리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민관(民官)이 합심해 전략 산업을 집중적으로 키우는 길밖에 없다. 차기 대선 주자들에게 산업 구조조정 방안을 공약(公約)으로 제시하라고 요구하면 무리일까. haed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