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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1846년 6월 29일은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날이다. 중세부터 약 560년 동안 내려온 곡물법 폐지안이 의회에서 통과됐다. 곡물법은 밀 1쿼터(12.7㎏) 가격이 80실링을 밑돌 경우 외국산 밀의 수입을 금지시켜 법으로 가격을 보장했다. 당시 의회의 다수파인 토지 귀족과 지주들은 이 법을 강력히 옹호했고, 반면 산업자본가들은 밀 가격이 오르면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가 거세지기 때문에 폐지 운동을 벌였다. 법률 개정·폐지 운동이 벌어졌지만 번번이 의회에서 좌절됐다. 그러나 밑으로부터의 압력과 아일랜드의 대기근이 창궐하자 집권 보수당의 로버트 필 총리는 곡물법을 폐지하지 않고는 영국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폐지론으로 돌아섰다. 결국 당의 지지 기반의 이해관계와 다른 법안을 통과시키고 필 총리는 사임했고, 이 일을 계기로 영국은 정계개편이 일어나면서 최초의 양당정치가 시작됐다. 당시 필 총리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위대한 결단을 내린 총리로 지금도 추앙받고 있다.

2016년 12월 9일 대한민국은 경험해 보지 못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234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대통령이 소속된 새누리당의 의원 62명도 찬성표를 던졌다. 51.6% 과반의 지지로 4년 전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은 지지율이 4%까지 추락했다. 표면적으로는 박 대통령·최순실의 국정 농단과 비리가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1970년대식 권위주의 통치 스타일로는 더 이상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사태이기도 하다. 역사의 방향을 바꾼 ‘한국판 곡물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 1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비선 실세에 의존하는 시스템으로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됐다.

27일 새누리당을 탈당, 창당 선언을 한 개혁보수신당(가칭)은 ‘진짜 보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포용적 보수’ ‘서민적 보수’ ‘도덕적 보수’ ‘책임지는 보수’라는 화려한 수사를 다 동원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과는 달리 지난 1990년 3당 합당으로 사실상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보수정치’는 부패·무능, 기득권 세력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정권 때마다 터져 나오는 대형 비리사건과 무능·무책임으로 정권을 야당에 넘겨주기도 했다. 재집권 10년도 되지 않아 다시 정권을 빼앗길 위기에 직면해 있다. 내년 조기 대선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보수신당이 보수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길 원한다면 뼛속까지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필 총리처럼 정권을 잃을 각오를 하더라도 미래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 것은 희생하지 않고 변화하겠다고 한다면 믿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영국에서 곡물법이 폐지되면서 자유무역과 양당 체제가 정립됐듯이 박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보수가 거듭 태어난다면 한국 정치의 근본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보수신당의 탄생 과정과 구성원들을 보면 무슨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든다. “친박은 내가 만들었다”고 자랑하던 사람이 이제 그 반대편에서 ‘친박 타도’를 외치고 있다. 위치만 바꾸고 분칠을 조금 했을 뿐이다. 좋은 집안에 좋은 지역구에서 ‘웰빙 정치’를 해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스스로 정치적 성과를 냈다기보다는 그저 탄압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권 도전 운운하는 이도 있다. 바로 신당을 이끌고 있는 김무성·유승민 의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탈당 마지막까지도 당권을 잡으려고 틈을 보다가 여의치 않자 결행하는 기회주의적 모습도 보였다. 지금도 세가 불어나는 곳에 붙어야겠다고 관망하는 의원들이 상당수다. 의식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위치만 바꾸었다고 보수 혁신을 이뤄낼 수 있겠는가.

진정 보수의 가치를 세우는 정치를 하겠다는 결기가 있다면 시작부터 달라야 한다. 촛불 민심은 박 대통령에 대한 규탄도 있지만 정치가 제발 달라지라는 요구였다. 정치인이 누리는 특권을 과감히 벗어던져야 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냥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정치 활동이 투명하게 이뤄지도록 국민과 소통하고 민생과 안보에서는 그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적당히 신장개업하고 좌파 흉내만 조금 내면 손님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