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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권 정치부 차장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 심판대에 올리면서 우리 사회 음습한 곳에 숨어 있던 민주주의 적들을 햇볕으로 끌어내고 있다. 국회 국정조사에서, 특별검사 수사에서, 탄핵 심판 절차에서 민주국가의 상식과 신뢰를 깨뜨리는 반민주주의 행태가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국정농단 관련자뿐 아니라 주요 정치인도 민주국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15일 국정조사 4차 청문회는 지성인의 허위와 가식이 가득 찬 한 편의 풍자극이었다.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 대한 각종 특혜 의혹이 교육부 감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지만, 이화여대 증인들은 의혹을 부인하며 억울함마저 호소했다.

정 씨 특혜 의혹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김경숙 전 신산업융합대학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일관해 치매를 의심케 했다. 김 전 학장으로부터 최 씨의 딸이 지원했다는 말을 듣고 인터넷까지 뒤져 봤던 남궁곤 당시 입학처장은 “(‘금메달을 딴 선수를 뽑으라’는 말이) 결과적으로 유리하게 됐을지는 모르지만 정 씨를 특정해 말한 것은 아니다”라며 청문회를 농락했다. 이화여대 교수들도 한번 만나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할 정도로 문턱 높기로 유명했던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은 “학부모”라며 최 씨를 만났다. “그런 부분(특혜)은 없었다”고 딱 잡아뗀 뒤 “원래 남자와 단둘이 만나지 않는다”는 최 전 총장의 말은 풍자극의 압권이었다. 청문회는 ‘특혜는 있었지만, 특혜를 준 사람은 없었다’는 기막힌 결론을 낳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술은 했지만 시술한 사람은 없다’는 박 대통령의 미용 의혹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세월호 참사 발생 닷새 뒤인 2014년 4월 21일에 찍힌 박 대통령의 얼굴에서 주삿바늘 자국과 부은 모습이 확인됐다. 또 박 대통령이 마리오네트(일명 심술보) 주름을 펴기 위해 필러 주사나 실 리프팅 등 미용 시술을 한 흔적인 피멍 사진들이 잇따라 공개됐다. 그러나 최 씨가 단골이었던 성형 병원의 김영재 원장은 14일 청문회에서 “필러 자국 같다”면서도 “안면 시술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김 원장은 밤에 청와대에 불려 들어갈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그는 성형외과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다. 이날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박 대통령의 전·현직 주치의와 자문의, 청와대 전 의무실장, 간호장교 그 누구도 박 대통령의 얼굴에 손을 댄 사람이 없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국정농단은 있지만 농단을 한 사람은 없다’는 박 대통령의 탄핵 답변서도 마찬가지다.

민주국가는 시민들이 약속한 공동 규범과 시민 상호 간 신뢰에 의해 그 안정성이 유지된다. 당연한 것이 부정되고, 상식이 파괴돼 사회계약과 상호 신뢰에 금이 가면 민주주의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국정농단의 실체가 점점 드러날수록 민주주의를 흔드는 적들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다. 세월호 7시간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야 탄핵 기각 시 “혁명밖에 없다”는 혹세무민 발언이 이 땅에 자리 잡지 못하고 촛불을 만들어낸 시민민주주의가 더욱 건강하게 성숙할 수 있다.
y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