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제교 정치부 차장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다양성이 거세된 조직과 집단의 말로를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은 주변을 ‘시녀들’로 채웠고, 이견을 제기하는 인사들은 가차 없이 솎아냈다. 대변인은 인사 때마다 “○○장관, △△수석 내정자는 박근혜정부의 국정 철학을 이해하고 있으며…”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그 문구의 함의는 대통령 뜻을 거스르지 말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침묵은 나라를 좀먹게 만들었다. 진화를 멈춘 갈라파고스 정치, 사상적 근친교배 패악의 결과다.

병든 국가 앞에서 세계를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은 보호무역주의로 충돌할 기세고 러시아와 일본은 경제 협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11일 ‘하나의 중국’ 원칙에 의문을 표시해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심기를 건드렸다. 14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렉스 틸러슨 엑슨모빌 최고경영자를 국무장관에 지명하고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포린 어페어스는 2017년 1·2월호에서 최근 국제정세 흐름을 “주권국의 권리를 보장하는 세계 질서 1.0 시대에서 책무까지 강조되는 세계 질서 2.0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책무는 인권 탄압과 학살 등 국제규범 위반은 다른 나라의 군사 개입이 용인된다는 적극적 주권국 역할론이다.

힘의 우위와 질서가 바뀔 때마다 한반도는 요동쳤다. 일본의 제국주의 폭력이 동아시아를 뒤덮었던 19세기 말 대한제국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해방을 맞지만 미·소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됐다. 그리고 지금 미·중 패권경쟁의 구도 속에서 인권탄압의 대명사인 핵 무장국 북한은 남한을 위협하고 있다. 분명한 점은 한국이 탄핵 정국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주변의 대국들은 모두 자국 이익을 위해 질서의 재편성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73년 6월 23일 대한 뉴우스를 들어봤다. 중앙청 제1청사 회의실에 섰던 박정희 대통령은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우리는 객관적 현실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며 “긴장 완화와 국제 협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표방한 박 대통령의 6·23선언은 주권적 결정은 아니었다. 미·중 데탕트 전개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대북 적대 정책의 완화를 요구한 결과였다. 방향의 맞고 틀림을 떠나서 한국은 대국의 타협에 따라서 ‘두 개의 조선’ 정책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강대국 간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서 한반도의 주권을 보존하고 책임져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눈과 귀를 닫고 있다. 새누리당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백의종군해야 하지만 친박과 비박이 당권 싸움을 벌이고 있고, 더불어민주당은 사드 요격미사일 주한미군 배치 재검토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무효화까지 주장하고 있다. 대국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조변석개로 정책이 바뀌는 전형적인 소국 정치일 뿐이다. 그들은 소국인 한국에 북한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j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