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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엽 문화부 선임기자

세계 언론이 주목했듯이, ‘박근혜 탄핵’을 가져온 한 달여의 촛불 시위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전 과정이 비폭력으로 진행돼 정권을 탄핵까지 몰아붙인 ‘촛불’은 다른 나라에 시민운동의 한류(韓流)로 전이되지 않을까 싶다. 촛불 시위는 무엇보다 ‘광장 민주주의’의 실현이었고, 축제 같은 ‘즐거운 혁명’이었다. 과거처럼 ‘하나의 깃발’이 아니라 ‘다양한 깃발’ 속에 이어졌다는 데 각별한 차이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알려졌다시피 사람들은 ‘장수풍뎅이연구회’라든지, ‘민주묘총’ ‘고산병 연구회’, 심지어 ‘혼자 온 사람들’ 등의 생소한 깃발 사이를 오가며 시위를 즐겼다. 깃발은 특별한 의미가 없었고, 단지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다’는 경계 없는 유연함과 즐김을 보여줬다. 대중은 ‘하나의 깃발’이 갖는 독선과 경직성을 스스로 터득했고, 함께, 즐겁게 할 때 길게 이어진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촛불은 폭력성과 경직성을 보기 좋게 넘어 일상 속에서 타올랐다. 과거 대중의 변혁을 향한 뜨거운 에너지는 정치권의 ‘개량’으로 절단·포획돼 흐지부지돼온 경험이 있다. 하지만 유연하고 즐기는 촛불의 에너지는 절단과 포획이 쉽지 않아 보인다. 다양한 깃발은 외려 ‘헬조선’ ‘흙수저’ ‘99%’ 등 참가자들의 폭넓은 동류의식을 반영한다. 연령대와 남녀노소를 넘어선 촛불 시위 참여가 ‘대통령의 문제’로 촉발됐지만, 그 기저에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며 누적된 우리 사회 평균인들의 깊은 열패감이 자리 잡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으로 한국 사회는 과거와 단층이 형성되는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 벌써 학계와 시민사회의 평가도 다양하게 나온다. 1960년의 ‘4월 혁명’과 1987년의 ‘6월 혁명’에 이어 이번 ‘박근혜 탄핵’을 3차 시민혁명으로 성급하게 부르기도 한다. ‘6월 혁명’으로 절차적 민주화를 이뤘지만, 한국 정치는 군부독재 시대의 양태를 온전히 벗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정권에 따라 차이는 컸지만, 제왕적 대통령과 승자 독식적 정치 체제는 늘 음습한 ‘공작’의 냄새를 풍겼고, 부정부패, 정경유착, 소통 부재는 가시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최고 권력의 총체적 부정과 부실로 야기된 ‘박근혜 탄핵’을 ‘87년 체제’가 넘지 못한 ‘박정희 시대와 단절’의 계기로 보는 학자도 나온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는 작금의 시기를 ‘시민혁명기(市民革命期)’라고 규정했다. 기(期)로 표현한 것은 ‘진행 중’이라는 의미와 ‘어떻게 완결되느냐’가 중요하다는 함의를 담으려 했을 것이다. ‘탄핵 이후’ 정치권은 일단 정치일정을 잡고 국가운용을 정상화하는 데 주력할 테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은 ‘200만 촛불’이 그저 대통령 임기 개헌 등 정치권의 개량과 수확으로 끝나지 않을까 지켜보고 있다. 야당의 대선후보를 위한 촛불은 아니었기에 ‘헬조선’으로 상징되는 척박해진 국민의 삶에 대한 근본적 변화, ‘87년 체제’가 아니라 ‘97년 체제’의 극복을 요구할 조짐이다. ‘탄핵 이후’ 정치권이 이런 요구를 모두 뭉개고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선만을 바라보고 정치게임과 이합집산에만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ejy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