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검은 거래’를 했다는 의심을 받고, 이 때문에 6일 국회 청문회까지 열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국격의 추락은 물론 세계 200여 개국에서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하는 기업의 경쟁력을 스스로 갉아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두환 정권 때의 일해재단 모금 문제로 1988년 12월 14일 유사한 청문회가 열렸던 것을 돌아보면, 지난 28년 동안의 정·경 관계 선진화 노력이 헛일이 아니었나 하는 국가적 자괴감까지 들 정도다. 그만큼 이번 청문회가 중요하다. 정치권력과 기업의 관계를 투명하게 하는 전기(轉機)로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이번 사건의 본질부터 잘 따져봐야 한다. 대기업을 무조건 정경유착의 공범이라고 매도해서도, 반대로 무조건 피해자라고 옹호해서도 안 된다. 삼성·현대자동차·SK 등 국내 10대 기업 총수 중 9명이 증인으로 출석한 이번 청문회는 미르·K스포츠재단 기금 출연의 강제성·대가성 문제가 핵심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총수들과 독대하면서 문화·스포츠 사업에 대한 협조와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협조했을 뿐 대가성은 없었다는 게 기업들 입장이다. 심지어 독대 당시엔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였다는 증언도 나왔다. 하지만 두 재단의 공익적 목적이 최순실 씨 등의 사적인 갈취 및 편취로 드러나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기업들은 항상 새로운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다. 총수들이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이런 건의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투명성이다. 권력이 기업의 약점을 이용했다면 갈취로 볼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직접 불러 돈을 요구한다면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총수들은 피해자다. 하지만 기업도 기금 출연과 별도로 현안 해결을 요청했다면 정·경 유착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밀실 독대가 아닌 공개적 행사에서 업계 현안을 거론하고, 정부가 합법적으로 돕는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정치권도 대기업도, 나아가 국민도 더 건강한 정·경 협력관계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고심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