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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정치부 부장

헌정(憲政) 68년을 넘기고 있지만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재임 중 불행해졌거나 아니면 퇴임 이후에 그렇게 됐다. ‘하야(이승만)→피살(박정희)→내란죄·반란죄 사형선고(전두환)→징역형(노태우)→자살(노무현).’ 현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되는, 헌정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기게 된 박근혜 대통령 역시 ‘비운의 계보’를 잇게 생겼다. 내년 6월이면 민주화 30주년이 되고, 산업화·민주화를 함께 성취한 기적을 이뤘다는 찬사를 받는 나라다. 그런데 국민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권력을 놓고, 이젠 하야하라고 외치는 상황까지 왔다. 경제는 최빈국에서 선진국 반열까지 왔는데, 정치는 56년 전의 4·19혁명까지 떠올리게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박 대통령에게만 돌을 던지기도 어렵다. 감시·견제해야 할 국회와 정치권은 허구한 날 싸움박질하느라 아무것도 몰랐다고 한다. 권력의 감시견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언론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멈추는 법을 모르는 호랑이가 끄는 마차에 운명을 저당 잡힌 신세다. 말 등에 올라탄 호랑이는 주인에게 위임받은 고삐(권력)를 휘두르는 법에만 익숙할 뿐, 고삐를 내려놓는 법을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기에 더욱 위험하다. 그런 결과로 인해 미래 설계와 국민적 축제의 마당이어야 할 대통령 선거는 ‘최고 권력자의 무덤’처럼 돼 버렸다. 국가 권력 구조부터 대통령 선거제도까지 확 바꿔야 한다. 이미 다양한 검토가 있었고, 역대 국회의장들이 개헌 시안도 만들었다. 승자독식의 대통령제는 고착화한 분단 정치 구도에서 괴물처럼 세를 불려왔다. 불안정한 분단 구도를 관리하기 위해 일사불란한 리더십은 필요악이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21세기다. 유례를 찾기 힘든 괴물 체제인 북한 김씨 왕조와 대적하느라 대한민국 정치 체제도 적대적 공생을 하며 닮아 온 것일까.

불행한 지도자를 가진 국민은 불행하다. 그러나 그런 대통령, 그런 국회의원을 키우고 뽑은 것도 국민이다.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불행한 대통령을 잉태하는 제도라도 손봐야 한다. 그래서 이미 여야 정치권은 물론 국민도 개헌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개헌이냐가 더 중요한 논란이다. 이에 앞서 당장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4·19혁명, 박정희 대통령 피살 후 12·12 쿠데타가 말해주듯, 급속한 권력의 공백은 정국을 블랙홀로 빠져들게 한다. 한 발 잘못 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다. 국민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이유다.

불같은 분노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머리는 얼음처럼 냉정해야 한다. 길거리에서 대통령 퇴진을 목이 터져라 외치더라도, 어떤 수습의 길을 선택할지는 멀리 보고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박 대통령 임기 단축과 개헌, 권력형 부정부패의 척결, 이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까지 이뤄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국가 시스템을 ‘리셋’할 수 있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늘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저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한 번 이런 기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현세대에 주어진 책무다.

cs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