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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논설주간

올 것이 왔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불통’ ‘비선’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파국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찍 왔다. 최순실 사건으로 폭발하긴 했지만, 근원적으로는 국민의 마지막 명령조차 거역했기 때문이다. 4·13 총선 민의 ‘여소야대’는 소통과 협치를 하라는 강제였음에도 잠시 시늉만 했을 뿐 십상시는 여전했다. 이미 2300여 년 전에 순자(荀子)는 이렇게 말했다. ‘민심의 바다는 권력의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 국정 지지율 5%, 배는 뒤집혔다. 배가 기울 때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도 모두 허비했다. 지난달 25일 ‘90초 성명’, 지난 2일 정치권과 협의 없는 ‘김병준 총리 지명’, 지난 4일의 알맹이 빠진 대국민 담화는 9회 말 투 아웃 상황에서 3진 아웃을 자초한 셈이 됐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박 대통령의 임기 말은 고립무원일 수밖에 없었다. 친박의 구심력은 오직 권력이었다. 친노처럼 이념적 지향도, 상도동·동교동계처럼 오랜 기간 민주화 투쟁을 함께 해온 동지애도 없었다. 권력이 건재할 땐 수족 노릇도 마다 않지만, 더 이상 권력의 단물을 기대할 수 없게 되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벌써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10·26 이후 배신 트라우마가 생겼고, 이 때문에 ‘어려울 때 도와준 최순실 비선’에 더 의존하게 됐다. 그로 인해 또 배신을 경험하게 생겼으니, 운명의 장난일까.

자업자득이다. 박 대통령 본인도 지난 4일 담화에서 모두 자신의 잘못이고 불찰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나, 아직도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국민은 더 이상 박 대통령에게 국정 대책을 바라지 않는다. ‘진솔한 고해성사’를 원한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속았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납득해야 허탈감과 배신감을 추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여전히 얼버무렸다. 물에 빠지면 중간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 단단한 밑바닥에 닿은 뒤 박차고 올라오는 것이 낫다. 측은할 정도로 바닥까지 떨어져야 한다. 개헌론 꼼수는 최악의 허우적거림이었다. 이제 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질서 있는 퇴진’이 마지막 책무다.

지금부터 임시 국정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대통령은 멈춰도 대한민국은 달려야 한다. 이를 위해 대통령의 위기가 하드 랜딩 아닌 소프트 랜딩이 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박 대통령의 헌법적 임기는 15개월 남짓 남았다. 하야(下野)에서부터 2선 후퇴, 거국내각, 중립내각, 책임총리 등 다양한 요구들이 분출하고 있다. 지난 주말 시위에서는 당장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리고 구속 수사하라는 주장이 넘쳤다. 그러나 개인사조차 특정한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되는데, 나랏일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분노는 정당하지만 대책의 결정은 냉철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 큰 낭패를 부른다.

이미 박 대통령은 방어 능력을 상실했다. 하야가 국민적 합의라면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에게 하책(下策)이다. 우선, 헌법 취지에 어긋난다. 내란·외환죄를 제외하고 임기 중 소추를 면하게 한 취지는, 그런 범죄가 아니면 임기를 보장하라는 의미도 된다. 이런 선례를 남기면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하야 요구가 분출할 것이다. 실제 하야 사태가 벌어지면 그 뒤 수순(手順)도 만만치 않다. 그런다고 야당이 저절로 ‘대안’으로 떠오르진 않을 것이다. 아직 준비도 덜 됐다. 그래도 퇴진을 원한다면 국회 탄핵이 중책(中策)이다. 의회민주주의 측면에서도 국민 분노를 선동하기보다 국회로 수렴해야 할 책무가 있다.

멀리 보고 국익을 생각할 때다. 박 대통령이 실권(實權)을 이양하고 임기를 채우는 방법이 상책(上策)이다. 현행 헌법으로도 다양한 방법이 가능하다. 박 대통령은 임기 외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야당은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개헌에 대비해 내각제, 내각·대통령 혼합제, 이원집정부제 등을 경험해본다면, 그리고 종국에 개헌도 이뤄낼 수 있다면 허송세월은 아닐 것이다.

여당은 참회하고, 친박 아닌 보수 이념 중심의 세력으로 ‘재창당’돼야 한다. 야당은 ‘대선은 과거 심판 아닌 미래 경쟁’임을 잊어선 안 된다. 현 상황은 야당에도 양날의 칼과 같다. 여론은 흐른다. 정치는 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