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미숙 국제부장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됐다. 한국은 현대 세계사에서 최빈국에서 주요 20개국(G20)으로 올라서는 기적을 낳은 ‘유일한 나라’인데, 그 나라의 첫 여성 대통령이 주술적 예언가에 의지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보도가 세계 각국 언론 지면을 채우고 있다. 대통령의 부적절한 국정 행태 탓에 국가 이미지가 단번에 추락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저성장 고실업 등 경제난이 심각한데, 글로벌 기업의 경쟁력까지 갉아먹게 생겼다. 여기에다 국민을 더 분노하게 하는 것은 ‘국민적 자존’을 처참하게 무너뜨린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각은, 핵에 골몰하는 북한은 국제적 문제아,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를 한꺼번에 이룬 한국은 국제 우등생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일거에 ‘비이성적 지도자가 지배하는 북한 수준의 나라’로 떨어진 것이다. 북핵보다 한국의 리더십 위기가 더 걱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내년 한국 대선을 겨냥해 대남·대미 유화 공세를 펴며 남남 분열작전에 나서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회도 리더십이 흔들리고 내부가 분열되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멀리는 고대 로마, 가까이는 남베트남과 소련의 붕괴 주 요인은 외부 침략이 아니다. 냉전 시대 소련은 미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수천 기의 핵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지도자의 리더십이 무너지면 국가의 미래는 없다. 북핵 위기보다 내부 리더십 붕괴가 더 위험한 이유다. 사정이 이런데 박 대통령 임기는 아직 1년4개월 가까이 남았다. 이 기간에 직면할 안보·경제 등 국가적 난제들을 생각하면 결코 ‘임기 말’로 치부하고 넘길 수가 없다. 미국 대선이 1주일 앞이고, 한·중·일 정상회의도 한 달 앞이다. 북한 5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 제재 결의도 표류 중이다. 어떻게든 국가 리더십이 최대한 정상 작동될 수 있도록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 헌정사에 이런 전례는 없었던 만큼 민주주의 역사가 훨씬 긴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 수는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대통령 탄핵까지 가면서 미국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리처드 닉슨은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이 가결되자 스스로 사임했다. 가장 큰 요인은 시종일관 변명하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1986년 적국인 이란에 불법무기를 판 것이 드러나 탄핵 위기에 처했던 로널드 레이건은 핵심참모를 모두 경질하고 진솔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당시 임기는 2년여 남아 있었다. 거짓말로 일관한 닉슨은 탄핵으로 물러났고,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고 사과한 레이건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거듭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선이 1주일 앞이지만 국정지지율은 54%다. 개방적 리더십 덕분이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참모들과 치열하게 토론하며 해법을 찾았고, 진정성 있는 자세로 여론을 설득하며 돌파했다.

이제 박 대통령은 ‘마지막 애국’으로 생각하고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결자해지(結者解之)에 나서야 한다. 우선, 최순실 사건과 관련, 모든 것을 소상히 밝혀야 한다. 거국내각이나 중립내각 아이디어, 또는 청와대 개편 수준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진정성 있는 자세로 고백하고, 그다음엔 법과 국민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최순실 사건의 역설적 교훈은, 불투명한 권력은 반드시 권력의 사적 남용을 낳고, 결국에는 권력 자체를 뒤엎는다는 것이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예단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의 정치적·도덕적 기반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셀프 탄핵’의 심정으로, 헌법상 불가피한 대통령의 권한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국회와 내각에 넘겨야 한다. 그렇게 해서 진정성을 인정받아야 ‘진짜 탄핵’을 면할 수 있다. 국민 입장에서는 당장 화가 나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하야, 탄핵, 중립내각, 거국내각 등에서 무엇이 차선의 방안인지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훨씬 어려운 상황도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든 저력을 가진 나라다. 내년은 1987년 민주화 30주년을 맞는 해이다. 민주화 30년이 민주주의 후퇴가 아닌, 민주주의 발전의 출발점이 되도록 국가적 역량과 지혜를 결집해야 한다.